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Rainbow(무지개)’라는 제목의 유명한 시입니다. (한번 띠워 보실래요.)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누나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 한가지
나이가 들어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어도 좋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경건함으로 채워지기를
이 시에서 그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다름 아닌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말입니다. 어때요? 여러분, 이 말을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지요? 그러니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지만, 우리 어른들도 아이들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1-4)
아멘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배웁니까? “아- 목사님! 솔직히 말해서 요즘 아- 새끼들은 말도 안 듣고, 뺀질뺀질해서 한 대 쥐어박고 싶어요.“ 그래서요? 한 대 쥐어박으면 어떻게 됩니까? 특히 여기 캐나다에서는 자기 자녀를 한 대 쥐어박았다가 아이가 경찰에 신고를 하면 어떻게 되지요? 모르시는 분은 한번 해보세요. 삐뽀삐뽀- 경찰차가 출동하고 그 아빠를 수갑에 채워서 어디론지 무서운 곳에 데리고 갑니다.
그러니까 부모로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쥐어박지도 못하고, 속이 썩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부모가 그렇게 자녀를 키우면서 깨닫는 것이 있을 겁니다. 뭐지요? “아- 내가 어릴 적에 나의 부모님이 나 때문에 속을 많이 썩으셨겠구나.” 하면서 새삼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철딱서니 없는 자기 자녀를 계속 밉다고 하지 않고 용서해주고 다시 사랑해주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아- 하나님 아버지도 나 같이 못 말리는 녀석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계속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구나.” 하고 새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래, 나도 하나님처럼 계속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다짐도 하게 됩니다.
하루는 마더 테레사가 한 부잣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에서 어린이집을 지어달라고 수녀원에 땅을 기증했기에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방문한 겁니다. 그 집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중에 테레사는 그 집에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의 어머니에게 아이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때 아이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이 아이의 이름은 ‘사랑의 교수님’이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테레사가 다시 묻자 ”이 아이는 우리에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에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테레사는 그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심한 장애를 가졌고, 그토록 일그러진 모습을 지닌 아이를 ‘사랑의 교수님’이라고 부르며 아이에게 배운다는 그 부모를 보며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아이는 부모인 나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생님입니다.
부모님의 경우 자기 자녀들을 키우면서 한번쯤은 겪어보았을 일입니다. 다름 아닌 내 사랑하는 자녀가 큰 병이 들거나, 혹은 갑자기 큰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여 고통 속에 신음을 할 때, 혹은 아이가 거의 죽음의 순간에 빠질 때, 그 부모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전에 지었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까지 이런 저런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아- 그래야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고쳐주고 살려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회개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그 부모를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정근모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당시 명문교인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을 4개월 만에 마치고, 바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4세에 플로리다 대학의 조교수가 된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당시 정근모 박사는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거의 끌려 다니다시피 억지로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사람들이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래도 나는 과학자고 지성인인데 저렇게 광신자처럼 기도할 수는 없어.” 하며 그들을 판단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아들이 ‘만성신장염’에 걸려 앞으로 5년이 지나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울증에도 걸렸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한번은 차를 몰고 가다가 고의로 가로수를 들이받았고, 또 한 번은 10여 미터나 되는 낭떠러지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무에 그 육중한 차가 걸려 두 번 다 무사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부모로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지성인도, 아무리 고집이 세고 강퍅한 사람도 자기 자녀의 죽음의 고통 앞에서 그 마음이 약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보다 솔직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자녀가 부모를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는 겁니다.
하루는 조용기 목사님에게 노처녀 여성 전도사님들이 단체로 찾아와 인사를 하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목회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이 그들 전도사님들이 모두 노처녀인 것을 아시고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결혼이나 좀 해라.” 그리고 나중에 조용기 목사님이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결혼을 해서 살다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부가 혹은 식구가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 인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나도 모르게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목회를 하면 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것저것을 지식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입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적용이 되고 응하기까지 하나님은 또 다른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 도구 중에 하나가 사람이 될 수가 있고, 혹은 여러 가지 고난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좀 의외의 말씀을 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5:8-9)
아니 이게 뭡니까? “예수님이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니”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보다 한참 못한 우리들이 순종함을 배우고 온전해지려면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물론 많은 고난을 겪고 큰 고생을 한다고 다 예수님처럼 인격이 갖춰지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성질만 더 못되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고난은 우리가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인격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는 계획이 있습니다. 고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성경에 보면 대제국을 건설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이야기가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그가 대제국을 건설한 후 호화찬란한 왕궁의 옥상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내려다보며 이런 교만한 말을 합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4:30)
즉 그의 이 고백은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이 큰 바벨론 제국을 건설했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닌데.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큰 제국을 건설하도록 허락하셔서 된 것인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심히 교만해졌습니다. 그런 그의 교만함을 하늘의 하나님이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야, 재를 좀 깨닫게 하고 겸손하게 하라.”
결국 느브갓네살은 이런 교만한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정신병이 생겼습니다. 자기가 들짐승이라고 생각이 들어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짐승처럼 사납게 행동했습니다.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나 하늘의 이슬을 맞으며 지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지냈나요?
이에 대해 다니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단4:32)
즉 그렇게 교만한 느브갓네살이 “아하- 인간세계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권세도 주시고 왕권도 주시는 거구나. 내가 잘나서 된 것이 결코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 겸손해지기까지 이슬을 맞으며 짐승처럼 지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해지기까지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나서 그가 겸손히 하늘의 하나님을 우러러보자 짐승의 영이 떠나고, 다시 인간의 영이 돌아와 왕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만하면 짐승이 되는 것이요,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저의 경우나 여러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너와 내가 그나마 이 정도 살고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압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교만해지고 거만해지면 그의 결말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약4:6)
여러분, 사람이 계속 성공만 하고 높아지기만 하면 교만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고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실패도 주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내 자신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깨닫게 합니다. 고로 실패가 다가오거나 고난이 다가오면 느끼고 깨달으십시오. “아하, 너가 나를 겸손케 만드는구나.”
제가 처음 전도사로 발령이 난 곳이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이었습니다. 그곳에 오신 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큰 문제가 있거나 죽을병에 걸려서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그런 고난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겁니다. 즉 고난을 통하여 겸손해지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니 도리어 그것이 그에게 혹은 그 가정에 큰 유익이 되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좀 기분이 나쁘고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너와 나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거나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아무리 못나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사도 부러워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귀한 지위는 겸손한 자들이 얻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교만이 오면 그 모든 은혜가 순식간에 떠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마귀의 자식으로 변하게 되고 맙니다. 고로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나를 겸손케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 모든 상황 속에서 계속 겸손하시고 주님의 은혜가 계속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생을 세밀히 주관하시는 가운데 늘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끝까지 겸손케 하시옵소서. 그래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대화의 줄이 세상 끝날까지 끊어지지 않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