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으러 나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6)
아니, 여러분! 어떤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러 온 신자에게 목사님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 같은 것은 세례는커녕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라.”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나던지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한술 더 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라 생각하지 말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9-10) 즉 오늘날로 하면 세례 교인이라고 다 참 신자가 아니요, 집사라고 다 집사가 아니요, 목사라고 다 목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고, 겉모습은 비슷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사이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 혹은 신자들을 종종 나무로 비유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유할 때 세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포도나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들 나무 중에도 열매가 좋은 참 포도나무, 참 감람나무, 참 무화과나무가 있고 반면 열매가 나쁜 들 포도나무, 돌 감람나무, 돌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감람나무는 열매가 좋은 나무입니다. 반면 돌 감람나무는 감람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열매가 안 좋습니다. 그런데 참 감람나무였던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영 열매가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땔감으로 쓴다는 세례 요한의 예언처럼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나쁜 열매를 맺던 돌 감람나무였던 이방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는데 농부가 그 가지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했습니다. 그러자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열매가 좋아지자 원래 돌 감람나무 가지였던 이방인이 농부 되신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과 돌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에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오늘의 본문에도 예수님은 그 나무가 좋은 나무냐 나쁜 나무냐를 분별할 때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면 참 포도나무, 참 감람나무, 참 무화과나무, 참 신자이지만, 열매가 나쁘면 가짜 신자, 사이비 신자라는 것입니다.
밤나무의 경우를 보면 ‘너도 밤나무’가 있고 ‘나도 밤나무’가 있습니다. ‘너도 밤나무’는 울릉도에 있는 나무입니다. ’나도 밤나무‘는 옛날 70-80 노래 중에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하는 그 ‘마로니에’ 나무가 한국말로 하면 ‘나도 밤나무’입니다. 둘 다 겉모습은 밤나무처럼 비슷하게 생겼고 열매도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그 열매를 먹어보면 둘 다 영 아닙니다.
‘너도 밤나무‘는 신자로 하면 사이비 신자요, ’나도 밤나무‘는 신자로 하면 완전 가짜 신자입니다. 즉 “너도 신자니? 나도 신자다, 너도 집사니? 나도 집사다. 너도 목사니? 나도 목사다.”라고 하지만 둘 다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래요? 열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성도요, 집사요, 장로요, 목사요, 말들 하지만 열매가 좋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 망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내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고 좋은 포도 열매를 바랐더니 너희는 들 포도를 맺었도다. 이게 어찜인고?”(사5:2) 고로 “이제는 내가 그 포도원을 헐어버리고 짓밟히게 할 것이라.”(사5:5)
즉 열매가 나쁘면 아무리 선택받은 이스라엘 유다 백성이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로 믿는 자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고 우상처럼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여’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신실한 성도라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님을 입으로 ‘주여 주여’라고 해도 행실이 좋지 않으면 그 사람도 사이비나 가짜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도 고치고, 큰 권능을 행해도 열매가 안 좋으면, 행실이 나쁘면, 불법을 행하면 그것 역시 사이비나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게서 물러가라. 떠나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여러분, 기독교의 진리가 제대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반드시 좋은 열매가 나타납니다. 불의와 죄악이 만연한 사회가 공의와 정직의 사회로 변화가 됩니다. 거짓을 일삼는 사람이 진실해지고,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이 경건한 삶을 살게 되고, 자기만 알고 욕심만 부리는 사람이 남을 생각하고 남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진리가 제대로 들어가면 나쁜 사람, 나쁜 사회, 나쁜 나라가 좋은 사람, 좋은 사회, 좋은 나라가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가 바르게 들어가지 않고 사이비 가짜 이단으로 들어가면 겉은 그럴듯하지만 열매가 안 좋아집니다. 참 밤나무가 아니라 ‘너도 밤나무’ ‘나도 밤나무’처럼 되고 맙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무리 학교에서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착하게 살라고, 바르게 살라고 하지만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학생도 그렇게 바르게 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종교든지 나름대로 윤리와 도덕을 강조합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타 종교 간에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바르게 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돌 감람나무 가지를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이면 그 돌 감람나무의 가지가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즉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내가 아닌 예수님의 능력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소멸하여 예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옛날의 나쁜 성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즉 다시 타락하고 맙니다. 고로 우리는 늘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도록,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일 수 있도록 예수님과 늘 동행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말세가 되면 ‘너도 밤나무’ ‘나도 밤나무’처럼 겉으로는 “너도 신자냐? 나도 신자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지는 열매가 좋지 않아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신자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 끝까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늘 예수님과 동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