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우리나라가 지금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듯이 통일왕국 이스라엘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36년이 지난 후 남쪽 유다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망하기 바로 전 1차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11절)
여러분,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를 향한 생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가 학교에 가서 시험은 잘 치르고 있을까? 어제 공부한 것 덤벙대다가 틀리지 말아야 할 텐데... 날씨가 추운데 옷도 얇게 입고 가서 감기나 걸리지 말아야 않아야 할 텐데.... 빨리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해야 될 텐데... 외국에 이민간 자녀가 잘 살아야 할 텐데... 캐나다에 유학간 자녀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공부를 잘 해야 할 텐데... 이렇게 부모는 자녀들을 위하여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녀된 우리들을 위하여 많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고로 하나님께 합한 사람 다윗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40:5)
여러분, 다윗은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어찌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말합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곧 관심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관심이 많다는 것은 내가 곧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즉 하나님의 생각의 한 복판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생각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11절)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결코 재앙이 아닙니다. 불안이 아닙니다. 불행이 아닙니다. 비극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지금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고, 하나님의 성전은 불타 버렸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황무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고의 강국인 바벨론은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더구나 포로의 신분으로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불안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언제 또다시 자기들을 때리고, 끌고 가고, 죽일지 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비록 징계 가운데 있을지라도, 포로된 생활 가운데 있을지라도, 암담한 현실 가운데 있을지라도,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낯선 이국에서 포로의 신분을 가지고 살고 있을지라도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이 그렇지 포로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생활입니까? 더구나 이때는 포로생활의 초기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이 제일 힘듭니다. 군 생활도 처음이 힘들고, 감방 생활도 처음이 힘들고, 외국 생활도 처음이 힘듭니다. 그런데 주님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저들이 이런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저와 여러분들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가장 먼저 "평안하뇨?"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나갈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고로 요한복음 14:27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권력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삼라만상도 아닙니다. 재앙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다름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평안입니다. 왜 그럴까요? 평안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이 평안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11절)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축복이 평안이라면 소망은 장차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인하여 그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신앙이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그 암담한 현실 속에 사는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포로가 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포로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하리라는 소망을 가지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장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꿈과 비전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마귀의 생각은 자포자기입니다. 오늘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자는 오늘도 전진합니다. 낙망하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분명했기에 자기를 죽이려는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 꿈 때문에 그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도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갈렙을 보십시오. 그는 인생의 나이 85세에도 불구하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치며 도전하며 전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꿈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것도 산 위에서 120년간에 걸쳐서 그 배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원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감옥에 갇히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고 세 번이나 태장에 맞고 온갖 어려움과 핍박을 당했지만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우리가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도전하며 달려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을 마음에 간직하고 사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불평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이 주신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비교해 보세요. 얼굴 표정부터가 다릅니다. 주름살의 방향이 다릅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신문에 자기가 고양이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진 부인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아멜라라고 하는 부인은 20년 전에 고양이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키우던 고양이가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애지중지하던 고양이가 죽자 그녀는 매우 허전했습니다. 그녀는 넉넉한 처지가 아니었기에 예비로 사둔 고양이 밥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식사 때마다 먹기 시작했습니다. 인스턴트로 된 이 고양이 밥은 한국의 라면보다 비싸고 그 맛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 고양이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한 것이 버릇이 되어 이 십 년 동안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양이 밥을 먹으면서 자기가 점점 고양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진짜 고양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고양이처럼 그르렁그르렁 소리를 냈고, 경계심이 생기면 고양이가 하듯 쉬잇쉬잇 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의 생긴 모습이 점차 고양이처럼 변해 갔습니다. 스스로 고양이라고 생각을 하며 사니까 그 사람의 그 모습도 고양이를 닮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가 여러분의 인생의 운명을 바꿉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형편과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과 장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외국 땅에서의 포로생활이라는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곳 캐나다 외국 땅에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날짜:
200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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