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날짜: 
2015/04/18
말씀: 
눅8:22-25
말씀구절: 

...

설교: 

갈릴리 호수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호수의 물이 빠져나가는 부분은 툭 터져 있습니다. 넓은 광야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갈릴리 호수를 둘러싼 산에 막히고, 이 터진 곳으로 좁혀서 들어오면서 돌풍이 됩니다. 이때 조용하던 갈릴리 호수에 큰 파도가 일어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12 제자가 탄 배가 이 돌풍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배 한쪽에 주무시고, 제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런 위기상황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위험을 만나기 전에는 12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 말씀을 직접 배우고, 기적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 예수님께 인정받아 12 제자에 뽑혔으니 믿음 하나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인정했습니다. 제자들은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면했습니다. "그 까짓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 기도하면 된다. 믿으면 다 된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이 위기를 만나자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죽겠다." "차라리 죽은 게 낫겠다." 오직 이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은 믿음의 문제는 이미 다 통과하고 넘어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오래 믿으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시시하고, 신앙의초보자나 들어야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너무나 쉽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이나, 심각한 문제를 만나면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사실은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을 생각부터 합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믿음에 관한한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인데 폭풍을 만나자 12명 그 누구에게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탄 배에 함께 계신데도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인자가 올 때에 참으로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한탄하셨는데 오늘의 성경 내용이 그와 같습니다.

즉 우리는 신앙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믿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세례와 능력과 은사와 선교를 말하기 전에 믿음을 가르치는 복음서를 다시 공부하고, 복음서를 통과한 후 비로소 사도행전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요구하는 믿음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능력의 사도행전으로 넘어 갈수는 없습니다.

12 제자들처럼 자기 자신이 스스로 “나는 믿음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믿음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추켜 세워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믿음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서에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은 우리들에게 유전되어 오는 고질병과 같습니다. 이러한 불신의 고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믿음의 기초가 든든히 서지 않고는 그 어떤 신앙적 모습도 모래 위에 세운 집,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는 큰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의 집이 쉽게 요동되고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유익한 이유는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 너무나 듣기 좋은 말씀입니다. 용기와 힘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는 자‘라는 말 속에 담겨있습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믿는 자‘ 즉 주님이 보실 때 주님이 인정할만한 ’믿음이 있는 자‘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상황이 왜 문제인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성격, 외모, 생활 등등... 30년을 한 동네에서 살았으니 오죽 잘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았지만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축복을 줄 수 없었고, 은혜를 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똑똑해진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모르는 말씀이 없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압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금도 동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던 안하던 이것은 사실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한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이것이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각자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의 믿음은 환경에 있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예수님이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이 자기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환경이 조금만 나빠지면 예수님이 자기를 버린 것 같고, 믿음에 회의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기도도 떨어지고 낙심과 탄식을 합니다. 예배 나오는 힘도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슬퍼하며, 쉽게 인상짓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풍랑이 일어나니까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것처럼 부정적인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환경이 좋으면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고난이 다가오고 문제가 터지면 금방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불신을 토해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내 수중에 돈이 떨어져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내가 실직을 당해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요. 파도가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신 것처럼 환경이 흔들리고 어려워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변질되어도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 외국 땅에서 풍랑을 만난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은 열심히 갈릴리 바다에서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밤 중에 누가 바다 위로 걸어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소리칩니다. 뭐라고 소리칩니까? “유령이다!”

요즘 사람들이 종종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유령이라 하고, 유령 즉 귀신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을 악하다고 하고, 악한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분별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이때 베드로가 나섭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라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오라.” 그러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용감하게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할렐루야! 이때 박수 한 번 쳐줍시다. 그런데 베드로가 순간 바람을 봅니다. 그리고 의심이 오고 무서워서 물에 빠지며 소리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걷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파도와 풍랑을 보니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즉 환경을 바라보는 믿음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오늘 예수님은 질문합니다.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혹 어떤 분의 믿음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자나 깨나 사람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문제가 있고 다급할 때 예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먼저 찾습니다. 저의 집안 이야기입니다. 제 누님이 늦게 시집을 가서 노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님이 출산을 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노산의 두려움으로 말합니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그러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뭐가 엄마 엄마야, 이때 주여 주여 해야지!” 그러자 누님이 다시 말합니다. “주여 주여!” 그리고 분만실에 “주여 주여!” 하면서 들어갔습니다. 노산이지만 아들 잘 낳았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임신하고 출산할 때 “주여 주여!” 기도하면서 딸도 잘 낳았습니다.

여러분! 보통 때에는 “주여 주여! 하면서 진짜 어려울 때, 주님을 찾아야 할 때는 ”나여 나여!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혹은 “너여 너여!” 하고 사람을 찾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는 분입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변질되기 쉬운 것이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146:3-5)

어찌 보면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고, 인간이 서로 의지할 수 없다는 것에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이 너무 삭막하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더구나 이 외국 땅에서 같은 한국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고, 더 나아가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조차 믿지 못하는 것에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그게 성경이 가르쳐준 인간의 진실입니다. 고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듣습니다. “사람보고 믿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믿어라.”

저와 같이 이곳 캘거리에서 이민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같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그렇게 좋았던 성도가 순식간에 변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님들이 이민 초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성도가 그런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 목사님들이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이미 그런 것을 하도 많이 겪어서 단련이 되신 목사님들은 “또 당했구나!” 하고 그러려니 하지만, 이에 대해 단련이 덜 되신 목사님은 “아- 그 놈 새끼!” 하고 욕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옆에서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니- 목사가 그렇게 욕을 해서 되겠습니까?” “아- 예수님도 욕을 했잖아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예수님은 그렇게 욕을 할 수 있어도 우리는 이민 목회자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욕을 하면 안돼요. 이민 목회는 성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바라보고 해야 돼요.” 그러자 옆에 목사님들이 같이 동감을 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이 오늘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리의 믿음은 환경에 있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에게 있어도 안 됩니다. 불완전한 사람에게 내 믿음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예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고로 오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으시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천국 갈 때까지 잘 마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