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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성경의 계명 중 어느 것이 가장 지키기 힘듭니까?” 글쎄요, 상습적인 도둑놈에게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가장 지키기 힘들겠고, 창녀에게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가장 지키기 힘들 것이요, 천하의 불효자식에게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지키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지키기 힘들 것이고, 물질에 집착이 센 사람에게는 ‘십일조를 드리라.’는 계명을 들으면 일곱 길로 도망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상숭배자에게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지키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은 아마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누가 나의 원수입니까?” 마태복음 10:36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미국의 대통령이 어쨌든지 간에 나와는 직접적인 원수가 아닙니다. 또한 옛날 히틀러가 아무리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어도 그는 유대인의 원수는 될지언정 나의 직접적인 원수는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이 어쨌든지 간에 나와 직접적인 원수 관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누가 나의 원수냐? 나와 가까이 지내면서 나를 손해 입히고 나를 해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수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운 곳, 즉 내 마음 속에 뼈저린 상처를 남긴 사람이 바로 나의 원수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남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바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원수를 사랑하십니까?” “에이,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원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랑과 친절을 베풀고 사는데 원수라니요, 저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의 일생에 원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면, 글쎄요, 이 분은 행복한 사람일는지 모르지만 아마 진짜 사랑을 못하신 분일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그리고 가장 위대한 사랑은 바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원수를 향해 이빨을 갈고 욕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두고 보자’!하고 기회를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보기 싫은 원수 ‘안보면 되지!’ 하고 관계를 끊고 멀리 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여러분, 만약 성경에서 이 구절이 없다면, 그리고 이 계명은 너무 지키기 힘들므로 안 지켜도 된다고 주님이 말씀했다면 예수님 믿는 것이 굉장히 편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내가 미워하는 녀석은 실컷 때려주든지, 아니면 꼬집어 주든지, 발길로 걷어차든지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풀고, 즐겁게 해주고, 사이좋게 지낸다면 인생이 아주 편하겠지요?
그런데 크리스천이 되다 보면 하나님께 구원도 받고, 축복도 받고, 건강도 얻고, 성령 충만한 기쁨도 얻지만,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아주 힘든 사명을 주님께 받을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축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 계명, 즉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3:16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이란 바로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스런 모습과, 사랑스런 행동을 하므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치고, 하나님의 꿈을 박살내 버리고, 하나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의 못을 박고, 그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원수들이지만,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골로새서 1:21-22에 말씀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화목케 하시고, 이제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셨다.” 에베소서 2:16에도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화목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우리가 말하는 로맨틱하다든지, 아름답게 보이는 그런 애인간의, 친구간의, 혹은 가족 간의 평범한 사랑이 아니라 바로 ‘원수사랑’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심장이 터지는듯한 답답함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되고, 가슴이 찢어지는듯한 고통의 비명도 때로는 질러야 되고, 용광로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한을 식혀야 되고, 머리가 빠지든지, 희어지든지 하는 큰 근심을 이겨야 됩니다.
이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주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에 그만 떼강도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돈과 귀중품을 털고 나더니, 남편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엄마와 대학교 다니는 딸을 차례로 강간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줄 테니 제발 그러지는 말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해도 강도들은 인륜을 저버린 죄를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거기다가 아내와 딸의 국부에 담배 불로 지져 놓는 상처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딸은 학교도 안가고, 씻지도 않고, 온종일 집안 구석에만 처박혀 있더니만, 그만 정신이 이상해져 마침내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내 역시 수치심과 공포감에 사로 잡혀 남편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두려워 떨면서 지내더니 마침내 음독자살을 시도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집나간 딸을 찾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이리저리 거리를 헤매야 했고, 한편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을 수시로 들락 달락 거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때 남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이 죽일 놈들!’ 하고 비명을 지르고, 주먹을 불끈 쥐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은 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눈에는 증오와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큰 상처를 품고 있는 남편에게 ‘그 강도들을 사랑하라.’고 말한다면 그 남편이 쉽게 ‘아멘!’ 하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혹 이렇게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야, 니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냐? 니가 내 고통과 상처를 얼마나 알아? 좋은 말 할 때 저리 꺼져! 꺼지란 말이야!”
여러분, 그렇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쉽지만, 일평생 지울 수 없는 쓰라린 상처를 직접 당한 사람에게는 이 말처럼 잔인하고 어려운 말이 없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지울 수 없는 뼈저린 상처를 당해본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어서도 가장 힘든 일은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할는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아니, 그 원수사랑 안 하면 어때요, 이 세상에는 그 원수 말고도 사랑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 길거리에 있는 거지들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들 사랑하고, 아프리카나 못사는 우리 북한 동포들 사랑하면 되지 않겠어요? 꼭 그 원수를 사랑해야만 되나요? 그것이 성경인가요? 아이고, 그렇다면 나 힘들어서 교회 못 다니겠음. 잠깐 머리도 식힐 겸 몇 달간 교회 방학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 때문에 갖은 어려움과 혹은 생명의 위험까지 당하면서 열렬히 사랑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또는 ‘타이타닉’과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듯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도 저런 사랑을 해 봤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신도 그처럼 고귀한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받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안겨다 준 사람을 목숨까지 받쳐 사랑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상처의 고통이 채 아물기도 전에 더 큰 상처를 주고, 이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잘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사랑하기는커녕 용서하기조차도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것을 왜 성경이 굳이 하라고 명령을 할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즉 원수를 사랑해야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늘에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위해 자신의 가장 아끼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며 그렇게 처참히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나 같은 원수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도 아버지처럼 원수를 사랑해야 진짜 그의 자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한 크리스천, 온전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크리스천, 온전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성도, 온전한 아버지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아무리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종교나 도덕 그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단순한 종교가가 아닙니다. 철학가가 아닙니다. 그 분은 사랑의 원천이시요, 원수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내놓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대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하고 끝까지 원수 사랑의 기도를 띠우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 분이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죽었기에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이 아닙니까? 만약 원수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나도 그 분의 힘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생깁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로 자신을 치는 무리들을 향하여 “주여, 내 원수를 갚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수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었기에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한 사울이란 청년이 드디어 나중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즉 원수를 사랑하면 나중엔 가장 위대한 열매가 맺습니다. 자고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치는 원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골고다 언덕길은 원수 사랑의 극치입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힘이 들어 쓰러지고 넘어지고, 또 쓰러지고 넘어져도 우리는 가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 십자가 골고다 언덕길입니다. 이 길을 가야 원수 사랑이 이루어지고, 이 길을 가야 나의 원수가 구원을 받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치며 죽어야 비로소 원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원수 사랑의 열매를 통하여 온 인류가, 너와 내가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결코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진리를 모르기 전에는 내 이웃만을 사랑했습니다. 나와 친한 사람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를 알기에,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원수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원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기에 우리는 아버지와 교제도 나누고, 아버지의 위로도 받고, 아버지의 행복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같은 아버지의 행복을 기대하며 성경의 가장 고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