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혹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줘 봐라. 보여 주면 나도 하나님을 믿을게.”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그냥 무조건 믿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어.”라고 대답합니까?
아니면 “그래. 이리 와봐라. 내가 너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라고 대답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볼 수 있는 분일까요? 아니면 볼 수 없는 분일까요? 정답부터 말하면 하나님을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을 못 본다는 성경구절도 있고,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구절도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못 본다는 성경구절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보여 달라고 하니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1-23)
하나님은 모세에게 얼굴은 보여주시지 않고 등짝만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는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인간이 보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양을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직접 쳐다보면 눈이 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신명기 34:10에도 이런 비슷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즉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등짝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면서 말하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24:9-11) 즉 모세는 늘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고, 이스라엘의 몇몇 지도자들은 이때를 비롯해 한두 번 하나님을 보았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동방의 의인이라는 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큰 환난을 당하여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하나님)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9:11)
그런데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에 보면 욥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즉 욥이 하나님을 보지 못한 시기도 있었고 하나님을 본 시기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안 보이십니까?
혹시 이전에는 하나님이 보였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안 보이는 분이 있습니까? 왜 그럴까요? 혹시 영적 눈, 영적 통찰력이 약해지지는 않았는가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잘 안 보이시는 분이나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아주 희미하게 보이시는 분은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서 보다 확실히 하나님을 보시기 축원합니다.
혹시 “나의 영의 눈, 영의 시력은 어떠한가?“ 한 번 체크해 보고 싶지 않나요? 영의 눈이 좋아서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은 일단 굉장히 행복합니다. 평안합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보이시는 분은 불안합니다. 기분이 늘 안 좋습니다. 시시 때때로 불평이 나옵니다. 대개 얼굴에 쓰여 있습니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삼손의 출생이야기가 나옵니다. 잉태치 못하는 삼손의 어머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장차 삼손이라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을 계시합니다. 그 후 또 다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삼손의 출생을 알려줍니다. 이때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아내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13:22)
그러자 그의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삿13:23)
이사야 6장에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보고 난 후 이런 고백을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창세기 32:30에 보면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를 만나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천사로부터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찬란한 해가 떠오르자 야곱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욥에게, 이사야에게, 삼손의 부모에게, 야곱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6:16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아무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즉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육체의 눈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구약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볼 수 있겠지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그러자 빌립이란 제자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주여 (하나님)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9-10)
요한복음 1:18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로 이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가셨고, 성부 하나님도 하늘에 계시고, 성령 하나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즉 마음의 눈,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영의 눈도 작동을 못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줘 봐라. 그러면 나도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동물들에게는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지진이나 쓰나미가 일어날 때에 보면 이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피신을 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영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가리켜 영의 눈, 혹은 영적 통찰력, 또는 영적 감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그 힘을 상실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에게조차 아직까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힘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면 일반 계시라는 것인데 하늘의 별들이 정확하게 운행하거나 이 세상의 생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부족하여 하나님은 특별 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보여주고 알립니다. 그 특별 계시 중에 예수님 육신으로 오신 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님이 아예 우리 안에 오셔서 그 분을 인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강아지를 키우는 분들은 한 번쯤은 들어보신 단어가 있을 겁니다. 흔히 말하는 강아지 ‘분리불안증’입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문을 열어서 데리고 나가야 밖을 나갈 수 있고, 먹을 것을 주어야 먹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강아지는 당장 고통을 당하고 죽고 맙니다. 강아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로 강아지는 주인이 자신의 생명입니다. 강아지에게는 주인이 마치 갓난아기와 부모와 같습니다. 갓난아이가 부모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강아지는 주인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주인 없는 강아지는 비참해지고 맙니다. 주인이 없으면 강아지 인생, 개생이 망하고 맙니다.
고로 강아지는 주인에게 늘 가까이 있고 싶어 합니다. 혹 주인이 집을 나가서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거나 오래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집니다. 이를 가리켜 강아지 ‘분리불안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다시 집에 돌아오면 너무나 반갑습니다.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 댑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하나님이 보이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해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여러분!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는 분이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이국땅에서도 하나님이 보이면 일단 안심이 됩니다. 그 분이 알아서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나를 날마다 쓰다듬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요즘 행복하십니까? 혹 불행하다고 느끼신다면 그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돈 때문입니까? 병 때문입니까? 사람 때문입니까? 환경 때문입니까? 물론 사람이니까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불행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COVID-19 전염병으로 인해 불행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돈과 병과 사람과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요,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마음을 청결케 하므로 늘 하나님을 보면서 그 분과 동행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