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날짜: 
2022/03/27
말씀: 
고전10:31
말씀구절: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설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 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제작이 된 유명한 소설입니다. 뭐 굳이 제가 오늘 이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제목이 오늘의 제 설교 ‘누구를 위하여’와 매치가 되기 때문에 일단 소개해보는 겁니다.

제가 구글 서치 엔진에 ‘누구를 위하여’라고 치니까 가장 먼저 이게 나오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 이게 아닌데!” 하고 제가 다시 이렇게 입력해보았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그러자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가 떴습니다. 그 분들의 설교를 보니까 제가 생각한 대로 내용이 거의 일치합니다.

사람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삶의 목적이 매우 중요한데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혹은 누구를 위하여 인생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돈을 얻게 되면 만족해하기도 하고, 그 돈으로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고, 혹은 장가도 가고, 여행도 합니다. 혹 어떤 분은 그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을 하기도 하고, 크리스천의 경우는 그 돈으로 교회에 헌금도 해서 하늘나라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이 어떤 일을 하는데 편리한 수단이 될지언정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돈은 우리들의 인생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삶의 목적’이란 말을 ‘사명(mission)’이란 말로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사명이란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왜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당신이 이 땅에서 사는 그 이유나 목적 즉 사명이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그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인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습니다. 물론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너와 나에게도 절대적으로 행복이 됩니다. 혹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아직까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인생의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좇아 사시므로 더욱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혹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바울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그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칠 정도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와 내가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천이 되면 이렇게 매주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아니- 이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렇게 매주 교회에 가는 거야? 그래서 어디 남보다 앞설 수 있겠어? 아휴- 참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쯧쯧쯧!”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내가 생명을 바칠 정도로 중요합니다. 많은 돈보다도, 높은 명예나 지위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참으로 좋은 은사를 주신 것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어디에 가면 식당을 먼저 세운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물건을 팔 가게를 세운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돈을 끌어 모을 은행이나 금융기관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세울까요?

교회를 세웁니다. 할렐루야! 아니- 이게 어찌된 된 일입니까?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서양에 비하면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가 진짜 얼마 안 됩니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불교를 더욱 오랫동안 믿었습니다. 마땅히 절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인들은 어디에 가든지 교회를 먼저 세웁니다. 그 옛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열사의 땅에 건설 노동자로 가서도 그곳에 먼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지의 땅 아프리카에 가서도 한국인은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미국 땅 하와이나 LA에 이민 가서도 한국인들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기 캐나다 캘거리 한인 역사를 봐도 교회 역사가 바로 한인 역사입니다. 지금도 여기 캘거리에는 한인 교회가 30개 정도가 있습니다. 와우- 한국인들은 참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열심히 특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으로 좋은 은사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세울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을 바칠 정도로 중요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교회에 모이는 겁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오늘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는데 그 준비 과정과 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더욱이 어린 자녀들을 챙기고 가족들 전부가 교회에 나오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갑니까?

도대체 피곤한데 왜 그러는 겁니까? 그것도 매주 마다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삶의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인생의 사명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가 사는 이유가 있고, 여기에 나의 행복과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되어보면 자신이 사는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게됩니다. 다름 아닌 자녀를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특히 자녀가 아프거나 힘들어하면 부모의 마음도 아프고 힘들어집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어렵고 힘들고 고생이 되도 나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때로는 자녀를 위하여 자존심도 내려놓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왕의 신하가 나옵니다. 오늘날로 치면 장관급입니다. 왕의 신하는 명예와 지위, 돈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믿을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이 병으로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자 평상시는 관심도 없던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당시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버나움에서 갈릴리까지 38km나 되는 먼 거리를 달려와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사정합니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또한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딸이 귀신이 들려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아니- 개라니요? 그것도 여자 면상에다 대놓고 개라고 하니 참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개와 같이 미천한 존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부스러기를 구했지만 이미 자신은 부스러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부스러기와 티끌이 되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지키려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자존심은 콘크리트 장벽보다도 무너트리기 힘든 벽입니다.

그럼에도 그 귀한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할 수 있는 이유는 자녀 때문입니다. 부부끼리는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지만, 자식에게는 가능합니다. 자녀가 잘되는 일이라면 술 담배도 끊고, 자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부모는 자기의 자존심과 체면이 상하는 것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초대 과학 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던 정근모 장관의 간증입니다. 그는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고를 수석으로 들어가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물리과를 차석으로 들어가고, 23살의 나이에 이미 미국에서 교수가 된 뛰어난 두뇌의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갖춘 그는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너무도 잘 나갔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들의 아픔 때문입니다. 아들이 15살 때 신장이 악화되어 아버지 정근모 장관으로부터 신장이식을 받아 간신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심리적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두 번의 자살시도를 하고 괴로워합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정근모 장관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식 때문에 삽니다. 그리고 자식 때문에 죽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는 자존심도, 명예도, 돈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 분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치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자신의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고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런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있고, 또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큰 사랑이 오늘도 순간순간마다 나에게 전달되고 있기에 나는 감격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내가 그 분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 분을 위해서라면 나도 수치와 조롱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이미 나에게 넘치도록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셨고, 또 계속 주시고 있습니다. 아- 하나님!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만도 넉넉하고 족합니다. 이제는 제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고, 제가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려야 되잖아요. 그게 맞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이 이것저것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고 원망불평을 합니다. 아니- 독생자 아들까지 주었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또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셔서 더 이상 우리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 주신 것들은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분을 위하여 종종 수치와 조롱도 당하고, 때로는 자존심도 상하고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중에 영광의 십자가로 변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영광중에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더욱 더 용기를 내시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