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존심이 파괴를 당할 때

날짜: 
2017/02/19
말씀: 
사53:3-5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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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나는 이래봬도 괜찮은 사람이다. 비록 키는 그리 크지 않고, 얼굴은 그리 미남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훌륭한 대학은 나오지 못했을지라도, 돈도 그리 많지 않아도 이 세상에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리켜 우리는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이 자존심이 파괴를 당하고 무너진다면 자칫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생활이 무기력해지고, 더 나아가 짐승처럼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존심이 상처를 당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금보다도 귀한 자존심이 깨어지고 짓밟혀서 고통가운데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1. 자존심이 파괴당한 여러 사람들의 모습
성경에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오랑캐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약탈당하고, 10명의 자녀들도 하루아침에 모두 죽는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온몸에 악창이 들어 큰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슬픔, 눈에 보이는 고통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슬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존심의 상처였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었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하나님도 자신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인정을 해주었는데, 이런 큰 환난을 당하니 그렇게 자신을 존경했던 자신의 아내, 친구들, 마을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종들까지 자신을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가장 큰 조롱을 당하면서 겪게 되는 자존심의 상처가 욥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상처였습니다.
또한 호세아라는 사람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가 2남 1여를 낳고 난 후 그만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창녀로 전락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가정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선지자가 아내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 그 아내가 가출을 하여 세상 창녀로 전락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또한 사래라는 여인을 봅니다. 그녀는 미모가 너무도 뛰어난 여인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자존심이 대단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기를 갖지 못해 자기 여종 하갈에게조차 멸시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남편 아브라함이 뻔히 보는 앞에서 애급 왕에게 시집을 갔다가 돌아왔으니 그 얼마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자존심이 파괴되어 보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이 깨어지고 파괴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존심이 파괴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당신의 자존심이 파괴되어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그 문제는 이 세상의 누구도 다 당하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사장도, 선생도, 학생도,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저와 여러분 모두도 자존심에 상처를 당한 쓰디쓴 경험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파괴를 당하지 않는 곳은 아마 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신문 기사에 보니 인신매매를 당했다가 다시 가정의 품으로 돌아온 자녀가 또다시 가출을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닌 학교에서, 가정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사도 보았습니다. 시험 때 취팅(cheating)을 하다가 들킨 한 여학생이 우울증에 빠져 심히 고민을 하더니 그만 유서를 쓰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 유서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요!”
여러분, 왜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입니까? 다름 아닌 예민한 청소년기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에 살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당합니다. 남편으로서의 자존심, 아내로서의 자존심, 어머니로서의 자존심, 아버지로서의 자존심, 성도로서의 자존심, 목사로서의 자존심, 이러한 자존심이 짓밟히고 파괴를 당할 때 우리는 삶의 용기를 상실하고 맙니다.
여러분, 이곳 외국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자존심에 상처를 당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몰라서 바보취급을 당하고, 문화를 몰라서 무안을 당하고, 법률을 몰라서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당황하게 되고, 더구나 자신이 하찮게 생각하는 이곳 사람에게조차 인종차별을 당하면 굉장히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한국에서는 꽤 잘나갔고, 꽤 유식했고, 꽤 존경을 받았는데 이곳에 와보니 자신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파괴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곳에서는 자신의 파괴된 자존심을 일으킬만한 또 다른 환경도, 또 다른 사람도, 또 다른 도피처도 제대로 없습니다. 결국 조그만 일로 말미암아 파괴된 자존심을 만회하지 못하여 우울증에 걸린다든지, 분노에 사로잡혀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일이 외국 생활에서 겪는 큰 고통이 아닙니까?
2. 누가 나의 자존심을 파괴하고 있을까요?
한국이나 미국의 대통령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파괴했습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명인사가 여러분의 자존심을 파괴했습니까? 아니면 한국의 아이돌 가수나 탤런트가 여러분의 자존심을 파괴했습니까? 여러분, 나의 자존심을 파괴하는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내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 나의 자존심을 가장 철저하게 짓밟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의 자존심을 가장 철저히 파괴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욥이 모든 재산을 약탈당하고, 10명의 자녀가 집이 무너져 압사 당하여 죽고, 자신은 악창이 들어 신음할 때 그녀는 남편 욥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여보, 우리가 이렇게 큰 고난을 당했지만 용기를 내고 다시 일어서십시다.”라고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흥,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잘 믿는다고 하더니 꼴좋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라고 말하며 오직 욥에게 남아있는 자존심을 확- 긁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문병을 온 욥의 세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이 당한 그 큰 환난을 보고 욥을 위로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욥과 논쟁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하므로 욥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야, 너가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치신 것을 보니 필경 너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이서 욥을 위로해주고 격려를 해주어야 할 친구들로부터 욥은 더욱 큰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또한 다윗을 보십시오. 다른 아닌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 압살롬이 자신의 후처를 욕보이고, 늙은 아비를 죽이겠다고 덤빕니다. 다윗은 허겁지겁 맨발로 엉엉 울며, 백발을 휘날리며 도망을 갑니다. 다름 아닌 자기 몸에서 난 자녀가 이렇게 반역을 하니 다윗은 왕으로서의 체면도, 아버지로서의 자존심도 신하들 앞에서 다 꾸겨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보십시오. 한 어린 비자가 “너도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 그런 말을 하고 난 후 예수님의 얼굴을 보니 예수님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 얼마나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베드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여-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나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했건만 어찌하여 나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아- 죽고 싶어라! 그는 너무도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폭발하며 통곡을 합니다. “그렇게 어린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내가 무슨 수제자라고! 에라- 예수님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고기나 잡으러 가자!”
다름 아닌 일순간의 실수가 베드로의 자존심을 파괴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수제자로 삼으시고, 그렇게 아끼고 보살펴 주셨는데, 자신은 예수님을 완전히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했으니, 세상에 못돼도 그렇게 못된 녀석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마음은 그러지 않았는데 자기 목숨 하나 건지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존심의 큰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베드로는 스스로 타락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3. 파괴된 자존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심이 파괴를 당할 때면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거나, 우울증에 걸리거나, 혹은 양심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사납게 변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수를 한다고 나의 파괴된 자존심이 완전히 치료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자존심에 더 큰 상처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나의 파괴된 자존심을 복구할 수 있을까요? 다름 아닌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파괴된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전에 나보다도 더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발가벗겨 조롱을 당하고, 신음하고 죽어가다니,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철저하게 자신의 자존심을 파괴당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파괴하는 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감추어진 죄를 만인 앞에서 끄집어내어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는 비판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따라오라고 강요하므로 우리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권세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지식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가려 주시므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자신의 자존심조차 십자가에서 깨트리며 우리의 파괴된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존심이 파괴당하는 그 고통을 예수님 앞에 나아가 위로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픈 상처를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깨어진 자존심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치료의 능력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그 분은 수많은 사람들의 파괴된 자존심을 어제도 회복시켜 주셨고, 오늘날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파괴된 자존심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고로 그분 앞에 서면 우리는 다시 용기를 회복합니다. 다시 새 힘을 얻고 힘찬 전진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날마다 자존심이 파괴당하는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더구나 외국 땅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는 더욱 오래 지속되기도 하며, 더욱 나를 파멸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나의 자존심을 끊임없이 회복시켜주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이 큰 상처도 능히 이기며 전진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진이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