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몇 달 전 제가 심장 부위에 '꾹-' 누르는 통증이 있어서 며칠 간 잠을 설치다가 병원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반 병원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아예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마침 응급실에 기다리는 환자가 없어서 곧 바로 진찰을 받았습니다. 먼저 응급실 요원이 물어봅니다. "어느 정도 통증을 느낍니까?"
이때 영어로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Very much!"라고 해야 합니까? 혹은 "Extremely painful!"이라고 해야 합니까? 제가 대답하기에 좀 주저주저 하니까 그 분이 다시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1에서 10까지의 통증 중 어느 정도의 수치입니까?"
제가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고, 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대충 짐작으로 대답했습니다. "5(Five)!" 그러자 그 분이 저를 그렇게 심각한 환자로 보지 않는 겁니다. 제가 여기 캐나다에 살면서 하도 많이 듣고 체험한 사실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 엄살을 심하게 떨어야 의사가 이런저런 검사도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이다 보니 그렇게 심하게 통증을 느끼지도 않는데 엄살을 떨기가 좀 양심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5(Five)!"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5(Five) 정도면 어느 정도 통증인가?"
혹시 여러분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제가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누는 방법입니다. :
1. 경미한 통증 : 일상생활 활동이나 수면 등이 가능(VAS 1-4 수준)
2. 중증도의 통증 : 일상 활동과 수면 등이 어려운 정도(VAS 5-6 정도)
3. 암성 통증에 준하는 통증(VAS 7-10의 통증)
여기서 'VAS(Visual Analogue Scale)'라는 1-10까지 나눈 통증 평가표가 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
0 : No Pain(통증 없음)
2 : Mild Pain(약한 통증)
4 : Moderate Pain(중증도 통증)
6 : Severe Pain(심한 통증)
8 : Very Severe Pain(극심한 통증)
10 : Worst Possible Pain(최악의 통증)
이러한 통증 수치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물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인생을 살면서 혹시 힘드시지 않습니까? 문제가 있지는 않습니까? 더구나 외국 땅에서 산다는 것이 힘이 들지는 않습니까? 만약 힘이 든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한 번 수치로 표현을 해보십시오.
0 : 전혀 힘들지 않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에요. 아- 나는 지금 행복해요.
2 : 인생을 살면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이 겹쳐서 일어나지만 지금 나는 조금 힘들어요. 그러나 참을 수는 있어요.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4 : 아- 저는 지금 힘이 듭니다. 더 힘들면 안 되는데... 더 나빠지면 안 되는데... 더 나빠지기 전에 기도를 해야겠어요.
6 : 아- 나는 지금 몹시 힘이 듭니다. 근심으로 인해 편안하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요. 누가 날 좀 도와줘요.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8 : 으악- 하나님! 저 이대로는 못살아요. 무슨 탈출구가 있어야겠어요. 아이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10 : 아- 하나님! 이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요. 날 좀 죽여주세요. 제발 저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 주세요.
혹시 이 자리에 수치가 8-10까지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분은 예배를 마치고 반드시 목사님에게 상담을 받으시고 기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이겨보려고 술, 마약, 쾌락을 좇아갑니다. 혹은 자살을 하기도 하고, 파괴적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인생이 힘들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기도도 잘 안하고, 주일 예배도 가끔 빠지는 사람이 갑자기 철야예배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일 예배도 잘 안 나오는 사람이 갑자기 새벽예배에 나타나면 제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뭐야! 저 양반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여러분! 새벽예배는 팔자가 센(?) 목사님이나 사모님, 그리고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지,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좀 특별하게 쓰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분은 새벽예배도 반드시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분은 대충 어물쩍 넘어가려면 안 됩니다. 옆에 분에게 인사 좀 해볼까요? "혹시 당신이 그런 분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좋은 습관과 취미가 있으면 참 좋습니다. 특히 음악가의 경우, 마음이 안 좋을 때 혼자 피아노나 기타 악기로 조용한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연주하면 마음이 한결 괜찮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혹은 혼자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시골길을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그리고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특히 시편을 묵상해 보십시오.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겁니다. 기도를 할 수 있는 분은 자신의 힘든 사정과 형편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털어놓으면 마음이 굉장히 좋아질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인생의 고통을 아주 심하게 당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욕'이 아니고 '욥'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10명의 자녀가 집이 무너져 하루아침에 죽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본인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들어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측정표인 VAS(Visual Analogue Scale) 수치로 보면 분명히 10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지옥 밖에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신음합니다. "하나님! 빨리 저 좀 죽여주십시오. 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욥이 그러한 큰 고통 중에 할 수 있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참는 것뿐입니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참아야 할까요? 물론 사람마다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인내의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어느 분은 조금만 자기를 건드려도 못 참는 분이 있습니다. 신경질을 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어느 분은 상당한 부분까지 잘 참습니다. 대견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죽기까지도 잘 참고 견딥니다. 참으로 위대합니다. 성경은 우리 예수님이 죽기까지 참았으니 너희도 죽기까지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또한 오늘의 본문도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인생은 참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참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목회를 하는 것, 특히 이민 목회를 하는 것은 결국 참으면서 하는 겁니다. 저도 이민 목회를 하면서 "승질 같아서는 그냥- 확-!" 하고 싶지만 그러면 하나님이 "이놈!" 합니다.
여러분! 죽기까지 잘 참으면 순교요, 참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탈영하거나, 배반하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찬송가 395장 3절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잘 이기는 자는 상 주시리니, 너 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 네 구세주 예수, 힘 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실상'이란 '버팀대'라는 뜻입니다. 즉 믿음이란 잘 버티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잘 버티면 믿음이 있는 것이요, 조그만 일에도 잘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시험 들면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소망도 그렇습니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바라봄, 즉 소망이 크면 클수록,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오늘의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즉 사랑에는 반드시 인내가 따릅니다. 그리고 이것도 잊지 마십시오. 누가 나를 열 받게 하고, 누가 나의 한계를 건드리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 혹시 나를 괴롭히는 남편, 아내, 자녀, 가족 식구, 가까운 친구, 이웃, 회사 동료가 있습니까? 잘 참아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날에 "너 참 잘 참았다. 수고했다." 칭찬하고 상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누가 성취합니까? 결국 잘 참는 사람이 성취합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각자의 한계가 있을 겁니다. 큰 고통도 잘 참으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조그만 고통에도 참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참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는, 나에게는, 너에게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참으려고 하면 못합니다. 내 성질, 내 히스테리, 내 그 괴팍한 성격, 어디 갑니까? 그러나 주님이 나를 붙잡아주시면 나는 참을 수가 있습니다. 나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나의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용서도 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이 힘을 주시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신앙이란 결국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와 내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너와 나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일에 대한 희망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오늘날 우리는 말세지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 고통의 한계에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그때일수록 주님과 함께 그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축복을 받고 누려야 합니다. 아무쪼록 너와 내가 주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승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