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날짜: 
2016/03/06
말씀: 
시61:1-4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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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제 병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캘거리 영락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김창선 목사님이 천국가실 때가 가까이 온 것 같다고 이메일이 와서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 뵈려고 갔습니다. 목사님께서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시고 식사도 거부하시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셨습니다. 천국에 가시고 싶다는 뜻입니다.
병실에서 기도도 하며 간호를 하시는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계속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고- 이민 목회 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는 스트레스 받고 싶어서 받겠습니까?”
그렇게 약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병실을 나오는데 사모님이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또 말씀합니다.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잖아도 이번 주일 설교 제목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라는 스트레스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 그래요. 어머나!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알았지요.”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운데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뜻은 눌리고 압박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장막 문제, 질병 문제, 물질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 비자 문제, 기타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눌리고 압박을 당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이 스트레스는 남녀노유 빈부귀천에 이루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공통의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스트레스의 도전 속에 이 스트레스를 극복하려는 응전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가정 속에서 부부간에 스트레스, 회사에서 직장 상사와 동료 간의 스트레스, 이웃 간의 스트레스, 심지어 교회에서 성도 간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말 못할 고민과 고통 속에 사로 잡혀 자신의 인생이 어쩔 수 없이 하나 둘 파괴되고, 더욱 큰 스트레스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스트레스에 대한 보다 완전하고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찾지 못하고는 결코 저와 여러분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오늘 이 스트레스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떻게 스트레스를 극복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 스트레스는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창1:31) 즉 세상을 창조하실 때 스트레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육식이 아닌 채소를 먹으므로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나님의 성산 에덴에는 상함도 해함도 스트레스도 없었습니다.”(사65:25)
그 가운데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창조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리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실과를 언제든지 먹을 있었습니다. 일단 의식주의 문제가 완벽히 해결이 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가 당하는 질병과 죽음과 각종 저주가 없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아담 속에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서로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짝이 있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데 아담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짝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적나라한 표현을 쓰자면, 동물이 발정기가 되어 그 짝이 없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입니다.
아담은 비록 이 땅의 통치자였지만 밤에는 홀로 고독과 쓸쓸함을 느끼며 기나긴 밤에 남몰래 스트레스를 당해야했습니다. 이런 아담의 스트레스 받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하나님은 아담이 깊이 잠들게 마취를 시킨 후 갈빗대를 취하여 아담의 짝인 하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자기의 짝을 얻고 난 후 고독과 쓸쓸함이라는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해결 받은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부러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서로 아껴주며 서로 사랑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사단이 뱀의 모양을 하고 아담의 짝인 하와를 유혹하므로 인류는 최초로 사단에게 스트레스의 일격을 얻어맞기 시작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죄악을 범하고 난 후 수치함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아 자기들의 몸을 무화과나무로 가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수치함이라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담을 하나님은 부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은 사랑의 음성으로 들려왔건만 죄악을 범하고 난 후 이제 그 음성은 두려움이라는 또 다른 스트레스의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하나님은 아담의 그 모습과 그 대답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담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스트레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또 다시 아담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3:11) 그때 아담이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그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이와 같이 수치감과 두려움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십시오.”
이와 같이 대답했다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아담이 당하는 스트레스의 문제를 금방 해결해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담은 핑계를 대고 맙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에게 주신 그 여자가 선악과를 나에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고로 나는 잘못이 없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하와를 쳐다보며 말씀합니다. ”하와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창3:13)
그때 하와도 자기 남편과 마찬가지로 핑계를 대고 맙니다. ”하나님,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창3:14) 고로 나도 잘못이 없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치미를 떼어서 자기 스스로 그 수치감과 두려움의 스트레스를 가려보았지만 오히려 더욱 큰 스트레스가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여자에게는 잉태와 출산으로 인한 고통과 스트레스가 다가왔고, 남자는 피땀 흘려 수고해야만 살 수 있는 스트레스가 덮쳐 왔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가시와 엉겅퀴가 여기저기에서 돋아 나와 자신의 삶을 찌르고 할퀴는 스트레스 동산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이고 나면 인간은 그 스트레스에 눌려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망의 판결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영원한 심판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 죄악을 범하고 난 후 제아무리 문명과 과학의 꽃을 피우고 발버둥을 쳐보았자 결국 스트레스의 진흙탕 속에서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바로 죄악입니다. 죄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건만 그 말씀을 싹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치우칠 때 스트레스는 다가오고 맙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떠나 수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보았지만 결국 이방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짓눌리는 스트레스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조금 고난이 다가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죄악의 도시 애급으로 내려가자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 스트레스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을 떠난 고기가 괴로워하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인 삶 속에서는 반드시 스트레스라는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나가면 그때부터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쓰디쓴 광야 40년 인생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살므로 수많은 스트레스에 눌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인들이 무엇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가?
성경은 기록하기를 말세에는 스트레스를 받는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딤후3:1) 분명히 옛날보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더 풍족하고 각종 문화 시설로 인해 더 나은 생활을 하지만 옛날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누가 스트레스를 줍니까?
“저 남자, 저 여자, 저 사람 때문이에요.”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옛날 하나님 앞에 서로 핑계되는 타락한 아담과 화와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스트레스는 더욱 쌓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뜯어 고쳐야만 합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해서 스트레스가 다가왔습니다. 내 죄 때문입니다. 고로 나를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나가야지 계속 서로가 자기 타당화를 하며 변명만 늘어놓는다면 스트레스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대인의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바로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사정없이 남에게 칼을 휘두르고,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각종 인신공격을 하고, 내가 남들보다 높아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물어뜯는 권모술수를 행하고, 내 차보다 남의 차가 먼저 끼어들면 사정없이 욕지거리를 하므로 스스로 스트레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이같이 자기중심적인 극한 이기주의는 서로를 물어뜯는 미움과 분노, 질투를 낳으므로 더 큰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맙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극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하는 스트레스를 해결하려고 남편을 6명이나 갈아치워 보았지만 여전히 스트레스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남편도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동네 사람으로부터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로 낙인이 찍혀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큰 스트레스를 느끼며 한숨을 지으며 아무도 없는 시간에 우물가로 다가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누구의 모습입니까? 쾌락과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스트레스 받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욕을 얻어먹고 비난을 당하자 인생의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받아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다윗 왕도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부인을 가로채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번민 속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때로는 죄와 허물로 인해 스트레스의 압박감을 느끼며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악과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스트레스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3.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까?
마귀는 말합니다. “야- 술이 있잖아. 술로 풀어. 시원한 맥주 한 잔 어때?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래도 안되면 독한 술을 마셔와. ”뭔데?“ ”아 한국 사람들이 잘 먹는 거 있잖아- 여기 한인 슈퍼마켓에서도 파는데...소주 말이야? 그것도 안되면 더 독한 위스키를 마셔 봐. 조니 워커?“
그리고 고스톱은 어때? 고돌이를 바라보고 힘껏 때려 보는 거야? 고스톱 칠 사람이 없으면 여기 가까운데 카지노라도 가봐. 그래도 스트레스가 안 풀리면 노래방에 가서 한번 신나게 놀아보란 말이야? 그리고 옛날에 부른 노래 있잖아. 니 잘 부르는 18번. 그것 무드 잡고 한 곡조 뽑아봐? “그게 뭔데?” “으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어찌 보면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유혹으로 마귀는 스트레스를 풀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마귀의 말을 좇아가면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 그러면 나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까? 크리스천은 만날 바보, 병신, 쪼다같이 꽁하고 답답한 모양으로 괜히 거룩한 체나 하고 스트레스에 눌려 한 평생 지내야만 합니까? 그래야만 거룩한 신자고, 그래야만 하나님을 잘 믿는 겁니까? 하나님, 나는 도저히 자신 없습니다. 나는 죽을 때나 믿겠습니다. 그때 되면 저를 꼭 불러 주십시오. 안뇽~”
이와 같이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의 길로 돌아서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여,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아니 진리가 나를 자유케하고 진리가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요? 도대체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아니 뭐라고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예수님이 진리라고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사53:2)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그래요? 그렇다면 한번 믿어보지요. 그런데 진짜 진리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스트레스가 풀어집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아니 주님, 나는 지금 당신께 왔어요. 그리고 당신을 믿어요. 그런데 왜 나의 스트레스가 안 풀어지는 겁니까?“
이때 또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스트레스를 받아)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3, 요15:9)
“주님, 어떻게 하면 당신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아니 계명을 지키면 당신 안에 거하게 되고, 당신의 사랑을 받아 이 스트레스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요? 도대체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키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아니,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요? 내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과 이 스트레스가 누구 때문에 다가왔는데요?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에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마6:14, 골3:13-14)
“아니 하나님,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눈곱만한 내 잘못을 주먹만큼 크게 확장해서 들춰내고 몰아붙인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합니까? 나는 악을 선으로 갚았건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악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하나님, 세 번은 용서해 주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나는 용서 못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 못해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렇게 근시안 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멀리 바라보아라.” “어디를 멀리 바라보라는 거예요?” “저 쪽,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 비취는 영문 밖에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곳 골고다 언덕길을 말없이 걸어가시는 주님을 바라보아라. 서쪽 하늘 붉은 노을~♬(1, 2, 3절)”
“주님, 알겠습니다. 나도 올라가겠습니다. 나도 걸어가겠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14)고 하셨는데 저도 용서의 십자가,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한 발 두 발 걸어가겠습니다. 한 발 자국~♬(2, 3, 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이 성전에 들어왔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 스트레스를 감출 필요는 조금도 없음.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허물을 들춰내는 분이 아니라 모든 나의 허물을 용서해주고 쌓여진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우리 주님도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목 놓아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