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라. 그리고 도전하지 말라.

날짜: 
2022/02/06
말씀: 
시131:1
말씀구절: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설교: 

제가 캐나다에 온지 올해 25년이 되어 갑니다. 캐나다에 있으면서 이전부터 꼭 한번은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자동차로 캐나다를 횡단해보는 겁니다. 일명 북미 대륙 횡단입니다. 그 동안 캘거리와 밴쿠버는 여한 없이 아주 많이 다녔기 때문에 이제는 캘거리에서 토론토 거쳐 오타와, 몬트리올, 퀘벡, 그리고 노바스코샤까지 가보고 싶습니다.

대략 5000km 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자동차로 밴쿠버에서 북쪽 앵커리지까지도 가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대략 3500km 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코스를 자동차로 여행해보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적극 말립니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참 묘합니다. 자꾸 말리니까 더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저희 집사람하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동차 여행을 같이 못합니다. 일단 저희 집사람은 체력이 안 됩니다. 그리고 운전도 못하니까 교대 운전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이 여행이지 저는 어떤 도시에 가서 뭘 구경하고, 경치를 보며 그런 것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지 차타고 낮선 지역을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쉬면서 또 기도하고, 그렇게 기도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마치 모세가 출애급 후 이스라엘 진영을 떠나 40일간 시내산에서 머물면서 십계명도 받고 하나님과 같이 지낸 그런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지 25년이 되어가도 아직까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일단 현실적으로 그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제 나이 62세가 되다보니 그런 긴 여행을 할 자신감도 좀 떨어집니다. 젊었을 때는 한번 도전해볼만 한데 나이가 들다 보니 그런 도전이 좀 무모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만약 하나님이 “김목사야! 한번 시도해보라. 도전해봐라. 내가 허락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마.”라고 하시면 “아- 그래요. 주님! 그러면 한번 해볼까요.” 하고 도전해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도전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제가 그런 긴 여행을 갖다 오면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고, 어떤 하나님의 큰 일이 성취된다면 한번 도전해 보겠지만, 그런 생명 살리는 일이 아닌 단지 여행을 위해서 노년에 위험 무릅쓰고, 돈 쓰고, 체력 쓰고, 시간 쓰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는 제가 North Glenmore Park를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날씨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North Glenmore Park에서 South Glenmore Park까지 연결하는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볼까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략 16km 정도 거리입니다. 좀 쉬면서 걸어가면 4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만약 혼자 산책을 하다가 얼음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난다든지 해서 중간에서 힘들어 멈추게 되면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기도 힘들고, 택시나 버스도 없고, 결국 911을 부르던지 아주 난감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여간 일단 마음먹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30분 정도 가다보니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

“아-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시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이렇게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사고가 나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든지 철저한 준비 없이 무모하게 도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고, 스스로 재난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도전정신인 용기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가져할 덕목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무모한 도전 즉 만용은 너도 위험하고 나도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 마라톤 풀코스를 도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장래에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꿈과 희망과 목표를 가지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 그만한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경우 중학교 때 야구부를 했습니다. 달리기 꽤 잘했습니다. 100m를 11.9까지 뛰어봤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도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도전조차 안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마라톤 풀코스를 안 뛰어 봤다고 누가 나를 멸시하거나 야단치지 않습니다. 즉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 맞게 도전할 것이 있고, 도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저를 주의 종으로 끝까지 사용하시려고 하는데 제가 중간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도전하는 것은 “에이-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이곳 캘거리에서만 사역하라고 하는데 “에헴, 나도 한번 세계로 나가보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주로 이스라엘 땅에만 머무시며 사역을 했습니다.

혹 어떤 분은 “아- 예수님 같이 위대하신 분이 세계로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면 더 좋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분이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처럼 세계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는 분이 따로 있고, 예수님은 당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에 죽으실 사명이 있었습니다. 즉 각자 사명에 따라 도전할 것이 있고, 도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를 어기고 도전해야 하는데 도전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고 나태입니다. 반면 이를 어기고 도전하지 말아야 하는데 도전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고 교만이요 불순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131:1)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윗은 소년 때에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입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이기고 이스라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더 큰 명예와 더 높은 영광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한 더 높은 지위와 영광을 취하려고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큰일에 도전하는 것은 안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천사장 루시퍼는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도전했습니다. 뭐에 도전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도다.”(사14:12-15)

즉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도전하다가 쫓겨나 사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과 같이 한 패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도전한 천사들 1/3도 쫓겨나 귀신들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잘못된 도전은 곧 반역이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단과 귀신들의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천지창조 때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실과를 다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선악과는 금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가 좀 더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금지한 선악과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입맛을 다시고, 꿀꺽 먹는 것은 훌륭한 도전정신이 아니라 저주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후 하나님이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시고, 그 표징으로 무지개까지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높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훌륭한 도전정신이 아니라 불신이요 불순종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도전해서 좋은 것이 있고, 도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건강과 행복을 위해 과학과 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도전하고 연구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없이 도전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 복제와 같은 하나님의 영역에 손을 대고 도전하면 큰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누구나 다이어트에 도전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살빼기 위해 40일 금식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율법서의 계명을 총 613개로 나뉩니다. 그중 248개는 ‘하라’는 계명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다시 말해 ‘하라’는 것은 도전하라는 것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도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한국에서 부흥회를 하면 초청 받은 부흥사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평소에 하지 못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이 부흥회를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 말씀 중 하나가 주의 종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주의 종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부흥사가 전할 때 보면 담임 목사님은 옆에서 아슬아슬합니다.

괜히 성도님들 중에 그 설교 듣고 마음이 불편하고 시험에 들까봐 안절부절못합니다. 대개 그 전하는 구절은 역대상 16:22과 히브리서 13:17입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가장 많이 상처를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목사님입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 교회에서 상처를 크게 받아서 통곡하며 울어본 분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교회에 남아있다면 그 분은 교회를 사랑하는 진정한 일꾼입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의 경우는 교회에서 가장 많이 상처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표시조차 낼 수 없습니다. 그게 목사님들의 운명이기도 하고,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목사님들의 상급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고 그 선지자를 상처 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계명 즉 그렇게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뉴스를 보면 이스라엘과 중동 문제가 많이 뉴스로 나옵니다. 그들의 오랜 싸움은 사실 영토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댓글들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하는 글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겁니다. “아니-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기 때문이야. 이건 내 뜻이 아니라고.”

성경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분들은 그 땅이 이스라엘 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땅의 주인인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인정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입니다.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민족입니다. 고로 누구든지 그들을 건들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차 말세에는 러시아, 이란, 터키 등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다가 큰 살상과 피해를 입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 에스겔 38-39장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라’라는 계명과 ‘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전도하라. 기도하라. 구제하라. 인내하라.” 이것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날마다 힘쓰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워하지 마라. 질투하지 마라. 남을 해하지 마라.” 그거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씀을 무시하고 도전하다간 큰 코 다칩니다. 결론입니다. 말씀에 따라 날마다 도전해야 할 것이 있고, 말씀에 따라서 도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두 계명 ‘하라‘와 ’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보다 평안하고 행복한 결말이 각자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