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의 기술(1)

날짜: 
2024/03/17
말씀: 
마28:20
말씀구절: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뜻은 인간은 혼자 살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보면 모든 동물들을 암수로 만들어서 같이 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각 생물들을 각각 종류대로 만들어서 같은 종끼리 같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첫 인간을 만드실 때 보면 일단 아담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홀로 지내면서 너무 처량합니다. 좀 안됐습니다. 그걸 보고 하나님이 “아하,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구나!” 하시며 그에게 ‘하와’라는 배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가 같이 살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인생을 같이 동고동락하며 동행하며 살라는 겁니다. 그것이 보기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하는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같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성경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같이 모여서 사니까 어떤가요? 뭐- 사이좋게 지내면 참 좋은데,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자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이가 좋아서 한때 잉꼬부부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부부가 나중에 보면 “어머, 아무개 누구누구 부부도 얼마 전에 이혼했데.”라는 뉴스를 접하며 “그래-?” 하고 새삼 놀라기도 합니다.

왜 그들이 끝까지 동행하며 살지 못할까요? 뭐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첫째 성격차이, 둘째 배우자의 부정행위, 셋째 돈 문제입니다. 그리고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러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동행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와 나 둘 중에 하나가 당장 지구를 떠날 수도 없고, 이미 한국을 떠나 여기 캐나다 땅으로 이민을 왔는데 여기에서 살다 보니 여기도 결국 사람 사는 동네입니다. 즉 여기서도 얼마 있다가 보면 또 다시 사람들과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이 힘듭니다. 특히 이곳은 외국 땅이기에 어디 딴 데로 탈출하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도피 수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의 세계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곳에서는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얼굴도 볼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 하고 갈등도 생기지도 않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쁘면 그냥 탈퇴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시지요? 온라인에만 푹- 빠져 있으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술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처럼 온라인 중독에 걸려 결국 오프라인인 현실 세상에서 적응을 못하고 인생을 스스로 망치고 맙니다. 얼마 전에 제가 뉴스를 보다가 한국에서 가장 큰 거인인 최홍만 선수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서 상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대인 기피증으로 인해 제주도에서 5년간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보니 “사람들한테 상처를 많이 받다 보니 사람 사귀기도 어렵고 대화가 안 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즉 사람과 같이 지내는 동행의 삶이 매우 힘들어 병까지 생겼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생긴 여러 가지 TV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도 보면 주인공들이 자연을 좋아해서 자연 속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뭐- 편안해 보이고, 제법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좀더 따지고 살펴보면 결국 인간이 싫다, 자연이 좋다는 겁니다. 왜요? 아- 왜긴요. 그 인간과 같이 동행하며 지내기가 좀 어렵다는 겁니다.

또 다른 TV 프로그램 중에 ‘나 혼자 산다’가 있습니다. 아니, 왜 혼자 삽니까? 아- 왜긴요. 그게 좋으니까요. 그게 편안하니까요. 다른 말로 하면 그 인간과 같이 동행하며 사는 것이 힘든 겁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인간과 같이 동행하며 사는 것이 때로는 힘들지 않습니까?

“목사님, ‘때로는’이 아니고요 ‘항상’ ‘거의 대부분’이 힘듭니다. 아- 나도 자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나도 혼자 살고 싶습니다. 다시 ‘나는 솔로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아- 그렇군요.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근데 이 말이 어찌 보면 좀 솔직한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본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17:9)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런 거짓되고 부패한 사람들에게 일부러 다가가라고 합니다. 그들을 전도하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합니다. 더욱이 그들과 같이 동행하며 같이 살라고까지 합니다. 아- 나도 부패한 인간이고, 너도 부패한 인간이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부패한 인간들뿐인데 이들이 모여서 뭘 합니까? 하늘나라를 아름답게 세우고 가꾼다고요?

물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의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즉 서로 만나야 하고, 같이 모여야 하고,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100% 맞는 말인데, 그 모임, 그 만남, 그 동행이 매우 힘들 때가 있다는 겁니다.

고로 우리는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처럼 ‘동행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너와 내가 서로 평안하고 고달프지 않습니다. 동행의 기술을 배워야 갈등을 극복하며, 큰일도 힘을 합쳐서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저는 세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동행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 실망이 크게 되고, 그 실망이 나중엔 원망이 되고, 그 원망이 나중엔 미움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결과 동행은 깨지고 맙니다.

부부가 결혼하기 전, 연애할 때는 잘 모르다가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그 인간의 못 말리고, 못되고, 저질이고, 병적인 성격이 결국 드러납니다. 이때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뭐! 인간이 거기서 거기지.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면서 “아- 너도 불쌍한 존재고, 나도 불쌍한 존재니 더 이상 서로 미워하지 말자. 하나님이 나 같은 원수도 사랑했고, 너 같은 원수도 사랑했으니, 나도 이 웬수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자. 아멘, 아멘, 아멘” 하고 매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살면 됩니다.

아멘이지요? 왜 크게 아멘을 못합니까? 그렇게 살면 내 인생이 크게 손해 보는 겁니까? 아- 좀 손해보고 살면 어때요? 나중에 하나님이 그 손해 본 것에 대해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해줍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약속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둘째, 그들을 돌보는 것이 내 사명입니다. 찬송가 595장 1-2절입니다. “나 맡은 본분은 구주를 높이고, 뭇 영혼 구원 얻도록 잘 인도함이라. / 부르심 받들어 내 형제 섬기며 구주의 뜻을 따라서 내 정성 다하리.” 여러분, 나의 본문, 나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 사람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이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까지 이 땅에 남아서 사는 이유는 그들을 돌봐야 할 사명이 아직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부모의 경우 죽을 때 어린 자녀를 두고 죽으면 마음이 심히 안 좋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소원 중 하나는 죽기 전에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죽는 겁니다. 저의 경우도 한 가정의 아빠요, 남편입니다. 아직은 내가 살아서 딸과 아내를 돌봐야 합니다. 집 앞에 눈도 내가 치워야 하고, 재무 관리, 은행일, 관공서 일, 각종 힘쓰는 일은 거의 내가 해야 합니다.

즉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가족 식구를 돌볼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담임 목사로서 여러 가지 사명도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21:15-16)고 하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목자는 양과 늘 동행해야 합니다. 사실 목사님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그들과 같이 동행하며 그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목사님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내가 돌봐야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라고 맡겨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돌볼 만큼의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내 몸과 마음과 정신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면 그때는 “다 이루었다.” 하고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면 됩니다. 즉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맡겨준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을 돌봐야 할 사명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의 동행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 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기의 백성들과 늘 동행하며 그들을 돌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란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속에 오셔서 우리와 늘 동행하며 우리를 돌보신다는 겁니다. 영어로 ‘God with us.'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주님이 우리 인간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간처럼 낮아지셔야 합니다. 겸손해지셔야 합니다. 결국 자기의 백성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죽어야 합니다. 제자들로부터 쓰디쓴 배신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셔서 한 사람 한 사람 다독거려서 살려야 합니다. 아- 진짜 피곤한 그 일을 주님은 끝까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부활 후에도 그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을 떠나가시기 전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즉 예수님이 승천하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다시 오셔서 늘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동행하시며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 같은 큰 죄인, 나 같은 저질, 나 같은 잡놈(잡년)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속 끝까지 사랑하시며 동행하시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나에게 왜 그러는 겁니까? 왜 나에게 그렇게 집착을 합니까? 내가 예수님께 무슨 유익이 된다고 그럽니까?

내가 나를 생각해도 더러운 쓰레기보다도 더욱 악취 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인데... 고로 가까이 다가가기고 싫고, 그냥 더러운 쓰레기이므로 코를 막고 미련 없이 버리면 되는데, 왜 예수님은 자꾸 나를 버리지 않고 나에게 달라붙을까요? 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실까요?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예수님은 부활 후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가 “야- 이놈아,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너까지 나한테 그럴 수 있냐?” 하고 열 받아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고픈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수 밥을 차려주시고 “애들아, 배고픈데 이리 와라. 같이 밥 먹자. 지금 잡은 생선도 좀 가지고 와라. 그것도 같이 구워 먹자.” 하시며 그들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이시며, 내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며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귀한 양떼를, 그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즉 맡겨준 그들과 같이 동행하며 그들을 돌보라는 겁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그 동행의 모습을 본받아 나도 그들과 늘 동행하며 그 사명을 끝까지 잘 이루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주님, 때로는 동행이 힘듭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동행하시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말씀하신 주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영원까지 내 안에 오신 주님과 늘 동행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맡겨준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을 돌보라는 그 사명도 잘 감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