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시는 하나님

날짜: 
2020/10/04
말씀: 
창5:21-24
말씀구절: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설교: 

퀴즈 한번 알아맞혀보세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개, 고양이, 다람쥐, 앵무새... 예- 답은 ‘애완동물’입니다. 영어로 ‘pet'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애완동물‘이란 단어보다 ’반려동물‘이란 말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영어로 ’companion animal'이라고 합니다.

이 ’반려동물(companion animal)' 말은 1983년 오스트리아 동물행동 학자로서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K 로렌트’라는 분의 80세 생일을 기념하는 국제심포지엄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습니다. ‘애완동물(pet)'이라고 하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난감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이라고 하면 인격체를 가지고 인간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반자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동물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극구 반대하시는 분도 있고 찬성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이 말에 반대하시는 분들은 한국의 경우 저같이 연세가 좀 많은 분들입니다. 일명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아시는 분들입니다.

반면 이 말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대개 중년층이나 젊은 층입니다. 물론 현재 ‘애완동물’을 키우시는 분들은 ‘반려동물’이란 말을 사용하기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와 집 사람의 경우는 평생에 ‘애완동물’을 키울 생각이 1%도 없었습니다. “아니, 목사와 사모가 외국 땅에서 주의 일하고 성도님들 돌보기도 바쁜데 무슨 개새끼를 키우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랬던 우리에게 강아지 한 마리가 3년 전에 생겼습니다. 남이 공짜로 줘서 할 수 없이 키운 것이 아니라 저희가 적극적으로 거금을 주고 브리더(breeder : 사육사)에게 분양 받았습니다. 그런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묻습니다. “What kind of dog?"

"He is 비숑 and 미니 푸들 mixed." 그런데 강아지를 키우면서 배우는 것도 있고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 “아- 이 녀석들도 사람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구나!” 주인이 집에 오면 좋다고 반갑다고 달려 나와서 마냥 꼬리를 흔들어댑니다. 맛있는 간식을 주면 팔짝팔짝 뛰고 좋아합니다.

때로는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놀자고 합니다. “아- 귀찮아!” 어떤 때는 삐치기도 하고요. 우울해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창문에 걸터앉아 몇 시간 동안 멍- 때리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쳐다보면 좀 웃기기도 하고 때로는 불쌍하기도 합니다. 즉 나도 모르게 감정의 교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혼자 사시는 분들은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 괜찮겠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강아지 한 마리 키우는 것 쉽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 요즘 강아지와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산책을 합니다. 이때가 저의 기도 시간입니다. 한국에서부터 저는 걸어 다니면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집이 한강 옆인 서울 강서구 염창동이라 한강변을 따라서 걸어 다니며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요즘 어떻게 기도합니까? COVID-19으로 인해 교회가 새벽 예배, 수요 예배, 철야 예배를 못 드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요?“

사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기도란 인간이 자신이 믿는 신을 찾겠다고 하는 의지요, 수단이요, 표현 행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기도는 그 이상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즉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의견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서로 교감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요즘 가을이 되어 쓸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더 나아가 슬프거나 우울한 분이 있습니까? 이런 분들은 하나님과 교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하다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산책도 강아지하고만 하면 종종 피곤합니다. 따분합니다. 지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산책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혹 어떤 분들은 마음이 답답하거나 눌릴 때에 드라이브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집안에 틀어 박혀 있는 것보다 훨씬 좋지요. 그러나 그 와중에 주님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서 대화를 하면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더 나아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이 대화의 세계를 모르시는 분들은 그저 “아- 목사님이 또 따분한 종교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고 별로 마음에 와 닫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순히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저 구만리 장천 먼 곳에 떨어져 있어서 별처럼 우리를 바라만 보시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즉 우리들은 그 분과 같이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며 동행하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러한 귀중한 특권을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빼앗기고 그 통로가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루시므로 이제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함께 하나님과의 대화의 통로가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고로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아예 영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같이 먹고 마시며 늘 나와 동행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한국에 있던지, 여기 캐나다에 있던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늘 대화를 나누면 외롭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습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행복해집니다. 사실 하나님이 내 안에 오시고 나와 동행하는 목적은 너의 행복, 나의 행복, 우리들의 행복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요,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신과 교감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고로 진짜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행복은 저 산 너머 무지개입니다. 즉 얼마간 달려가면 행복에 도달할 것 같지만 또 행복은 멀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몇 번 달려가다 보면 인생은 금방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즉 짧은 인생에 있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짧은 인생이 끝나고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서의 영원한 행복도 하나님과 동행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만남이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을 얻고 행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정들었던 그들이 결국 내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그리고 평생 같이 지냈던 배우자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때의 쇼크, 그 때의 슬픔, 그 때의 감정적 타격을 이겨내야 합니다. 즉 나와 늘 함께 동행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과 같이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에녹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그가 365살을 살았는데 65살 이전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도 이와 같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던 시기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기입니다.

이 둘 중에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을 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인생 끝날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님과 동행한 인물 중에 노아라는 분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니라.”(창6:9) 각자 자기 이름을 넣어서 고백해봅시다.“김원효가 하나님과 동행하니라.”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찬송가에 보면 맨 앞에 주제별로 찬송가들을 나누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주와 동행 : 430-447’이 나옵니다. 그 중에 제가 좋아하는 찬송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니가?... 옛 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동안 취직을 안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정 형편상 직장을 가야 합니다.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저의 어머니에게 상담을 해주면서 권면을 합니다.

“아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는데 돈 벌려고 직장에 다니고 바쁘다 보면 은혜가 떨어질 수 있는데... 차라리 이번에 은혜 받았을 때 직장을 잠시 미루고 좀더 기도의 단을 쌓는 것이 좋겠다. 이 애가 젊어서 기도줄이 잡히고 그 기도가 상달이 되면 하늘에서 평생 먹을 것, 쓸 것이 따라온다.”

그래서 저를 보따리 싸서 수원 쪽에 있는 칠보산 기도원으로 100일간 산기도를 하라고 보냈습니다. 제가 거기 가서 조그만 방 한 칸에서 짐을 풀고 새벽예배부터 다니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벽 예배에 갈 시간이면 꿈속에서 금쟁반에 은구슬이 굴러가는 청량한 소리가 들립니다. “또르를 또르륵..”

“아- 어디서 이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하고 깨어보면 새벽 예배에 갈 시간입니다. 그리고 또 하루는 아카시아 향기가 제가 자고 있는 방 뒤편 숲속에서 진동합니다. ”아- 향기가 너무 좋다!“ 하고 깨어보면 또 새벽 예배에 갈 시간입니다. 제가 일어나 방 창문을 열고 향기가 난 숲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초겨울이라 아카시아가 꽃이 이미 다 지고 없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잠자는 것을 보시고 아카시아 향기로 저를 깨우신 것입니다. 이때 새벽 예배에 가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걸어가리.”

결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십시오. 걸으면서 행복을 느끼고, 하루 하루 대화하며 동행하는 중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십시오. 더 나아가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