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음을 품지 말라.

날짜: 
2023/05/06
말씀: 
약4:8
말씀구절: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설교: 

제가 중학교 때 야구부를 해서 그런지 요즘도 종종 미국 Major League Baseball 게임을 봅니다. 특히 제가 캐나다에 살고 있고, 우리 한국의 류현진 선수가 토론토 블루제이 팀에 있기에 그 팀의 경기만 주로 봅니다. 그리고 한국 선수들이 있는 피츠버그 팀이나 샌디에이고 팀의 경기는 가끔 봅니다.

그런데 며칠 전 한국의 토털 사이트 스포츠 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샌디에이고 마차도 선수 과연 먹튀인가?“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먹튀’란 먹고 튀는 선수란 뜻입니다. 계약을 하기 전에는 엄청 잘하다가 일단 계약을 맺고 나면 그 다음에는 슬슬 적당히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욕을 엄청 먹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상당히 유식합니다. 그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여측이심’ 즉 ‘화장실의 두 마음’이란 한자어입니다. 한국말로 하면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기자가 영어로 이런 표현도 씁니다. “Danger past, God forgotten.(위험이 지나가면 하나님은 잊혀진다.)”

제가 이 구절을 보기 전에 하루 종일 “주여- 다음 주는 무슨 설교를 할까요? 주여- 영감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 “Danger past, God forgotten.(위험이 지나가면 하나님은 잊혀진다.)”는 구절을 보자마자 “아- 이거다!” 하고 영감이 와서 바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문제가 없어지면, 즉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말이 바로 이겁니다. “Danger past, God forgotten.(위험이 지나가면 하나님은 잊혀진다.)”

반대로 이런 경우의 신자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그럭저럭 잘 믿다가 그만 문제와 어려움이 생기면 낙심하고 의심하여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럭저럭 좋은 관계로 잘 지내는 사람이 갑자기 돈이 걸리고, 이해관계가 걸리면 돌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변하는 사람을 우리는 좋은 친구 혹은 진짜 친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사람을 좋은 신자, 진짜 신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겉의 마음과 속의 마음이 다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꼬집어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무덤 안에는 시체가 썩고 있습니다.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그런데 무덤 밖에는 하얀 색의 회를 칠해놓았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깨끗한 것 같지만 속은 아니라는 겁니다. 겉은 하얀 마음이지만 속은 시커먼 마음, 즉 두 마음의 소유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그리고 야고보서 1:6-8에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섬긴 적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촉구합니다. “너희가 강 저편의 신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하나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겠노라.”(수24:15)

그러자 백성들이 일심으로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리이다.”(수24:16,1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은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두 마음이 작동한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믿는 사람들 중에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믿는 것 같고 기도도 제법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당을 찾아가고, 점치는 곳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앞날을 물어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점쟁이들에게 물어보면 기독교인들 중에 이렇게 자기에게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즉 지정의(지성, 감정,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사랑의 감정도 가지고 있어서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 원하고, 또한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 중에 자신과 같은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남편과 아내와 같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우리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되고 신부가 되는 우리가 남편이 되고 신랑이 되는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신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슬퍼합니다. 질투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른 신이란 타락한 천사들인 원수 마귀를 뜻하거나 우상을 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마귀라고 하는 제비족에 미혹이 되어 영적으로 바람이 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또한 하나님도 사랑하고 마귀도 사랑하는 양다리 걸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했으면 이제 남편만, 아내만 바라봐야 되는데 자꾸 다른 사람 생각하고, 다른 사람 만나고 다니면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에 더 나아가면 우리는 그것을 불륜이라고 합니다. 부부 윤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더 나아가면 우리는 그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심각한 범죄행위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기면 그것을 간음 행위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다 보니 인생이 더욱 힘들어집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세에는 가정이 참 많이 깨지고 이혼도 많이 합니다. 그 중의 큰 이유가 바로 배우자의 불륜입니다. 간음입니다. 즉 두 마음으로 인해 생기는 비극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을 뜻합니다. 결혼을 했으면 오직 한 마음으로 배우자만 바라봐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었으면 계속 죽을 때까지 잘 믿어야 합니다. 중간에 믿다가 말다가 하면 안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26:3-4 말씀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저를 비롯해 이 세상의 목사님들이 기도를 하면서 늘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왔다리 갔다리 신자, 갈대 같은 신자가 반석과 같은 성도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특히 이번 COVID-19 사태로 인해 성도님들에게 이상한 버릇, 좋지 못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COVID-19 기간에 공식적으로 예배에 몇 년 동안 빠지다 보니 요즘도 무슨 일만 있으면, 툭-하면 예배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사랑하라.”(신6:5)고 하셨는데 도리어 그 반대로 합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적당히 믿습니다. 그게 바로 말세의 교회 현상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렇게 미지근하게 믿는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단호히 말씀합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여러분, 순복음 교회의 특징은 열심이 특심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불로 불로’ 되게 열심히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을 빨리 받습니다. 저의 집안도 순복음 교회에 와서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서 복을 빨리 받았습니다. 아- 그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학생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복도 빨리 받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순복음의 열심이 자꾸 식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도대체 왜 열심이 식어지는 겁니까?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서 그럽니까? 처음에 언급했듯이 ‘여측이심’ 즉 ‘화장실의 두 마음’이 작동해서 그러는 겁니까?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식어졌거나 변질됐으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열심을 내야하고, 마음이 딴 데에 가 있으면 그 마음을 다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돈에 마음이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10:21)

여러분, 믿어도 ‘일편단심 민들레야!’ 하고 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다 보니 슬슬 민들레가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뒷마당에 보면 벌써 민들레 밭입니다. 여기 캐나다 와서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여기 캐나다는 민들레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그 이유는 캐나다 민들레는 바람이 나서 그렇고, 한국 민들레는 바람이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즉 한국의 토종 민들레는 같은 토종 민들레의 꽃가루만 받아들이고 서양 민들레 꽃가루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의 토종 민들레는 토종 민들레 신랑이 오지 않으면 급기야 그 민들레는 처녀임신을 합니다. 그래서 봄바람에 흩날리는 한국의 민들레 꽃가루는 발아가 되지 않은 무정란이기 때문에 민들레가 여기 캐나다처럼 많이 퍼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캐나다를 비롯해 서양 민들레는 이놈 저놈 아무나 찾아오는 꽃가루를 다 받아들여 씨를 맺습니다. 고로 서양 민들레는 100% 발아가 되는 유정란이므로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이제 좀 의문이 좀 풀리지요? 즉 한국 민들레는 일편단심 한 마음을 가졌고, 캐나다 민들레는 두 마음, 세 마음, 네 마음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 민들레는 신랑이 하나고, 캐나다 민들레는 신랑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많은 캐나다 민들레는 번식력이 좋고, 신랑이 하나뿐인 한국 민들레는 그 신랑이 끝내 오지 않으면 긴긴 밤을 홀로 보내다가 그냥 혼자 무정란 꽃가루만 흩날리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은 한국 토종 민들레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여기 캐나다 민들레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습은 분명 같은 민들레지만 한국 것은 한 마음의 소유자고, 서양 민들레는 두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마음의 소유자가 있고, 두 마음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한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두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그리고 또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일편단심 한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기를 원합니까? 두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바람을 피며 살기를 원합니까? 물론 일편단심 한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산다는 것은 요즘 같은 말세에는 참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세에는 고통 하는 때가 이르고, 그 현상 중 하나가 배신 즉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배신하고, 친구 간에도 배신하고, 성도 간에도 배신하고, 직장 동료와 선후배 간에도 배신합니다. 더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쉽게 배신합니다. 아니- 그것은 배신이라고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제가 이 설교를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종교와 도덕의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한 마음을 가지고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원하시는 평안을 얻고 행복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아무쪼록 한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고, 한 마음으로 끝까지 충성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에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