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달려야 한다.

날짜: 
2023/01/07
말씀: 
히12:1-2
말씀구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설교: 

여러분, 혹시 달리기 잘 하십니까? 저의 경우는 중고등학교 때에 달리기 꽤 잘 했습니다. 100미터도 11초 대에 달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에 운동선수도 했습니다. 야구부에서 Third Baseman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도 종종 달리기 경주에 비교됩니다.

각자 주어진 인생의 기간 동안 오늘도 내일도 달려야 합니다. 골인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달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인생의 중간쯤 달려오신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골인지점이 거의 가까이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2022년이라는 한 구간을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때로는 지난해의 구간을 매우 힘들게 달려오신 분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달려왔다.” 하고 자부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근데 이제 2023년이라는 새로운 구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구간의 경주에는 만족할 만큼 달리지 못했어도, 이제 2023년은 좀 더 잘 달려야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일어나 힘차게 달려야 합니다. 남편도 달려야 하고, 아내도 달려야 하고, 청년들도 달려야 하고, 학생들과 아이들도 달려야 합니다. 노인들도 달릴 날이 몇 년 안 남았지만 달려갈 길을 다 가기까지 힘을 내서 계속 달려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12장에 앞서 11장에는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이미 믿음의 경주를 마친 사람들이요,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그 증인들을 보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 때의 12사도들을 비롯해 70인의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을 비롯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 길을 잘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 믿음의 유산과 바턴을 이어받아 우리들도 각자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2023년이라는 구간을 마치기까지 잘 달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2023년이 끝날 때 후회가 없어야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 본문은 몇 가지 사항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려야 됩니다.

달리기 선수가 무거운 외투를 걸쳐 입거나 무거운 짐을 들고 뛰면 안 됩니다. 힘들어서 중간에 지치고 맙니다. 우리들도 달릴 때에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뛰어야 합니다. 근데 무엇이 무겁습니까? 요즘 갈수록 몸이 좀 무겁지는 않습니까? 그게 단순히 나이가 먹고 기력이 딸려서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젊음이 좋다는 것은 아무래도 회복력이 빠릅니다. 한창 때는 하루 이틀 정도 잠을 자지 않고 꼬박 밤을 새워도 그 다음 날에 웬만한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을수록 점차 몸이 무거워집니다. 마음도 정신도 딸립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건강 수준에 맞게 몸과 마음을 컨트롤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영적 자기관리뿐만 아니라 육체의 관리도 잘해야 합니다.

특히 40-50대에 나이에 들어서면 한번쯤은 이런저런 이유로 허리가 아픈 경험을 하기도 하고, 몸이 예전처럼 말이 잘 안 듣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뭐야? 이거. 내가 왜 이러지?” 아- 왜 이러긴요? 내 육체가 늙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육체를 만들 때 쇳덩이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때가 되면 흙은 부서집니다. 결국 쓰러집니다. 고로 사는 동안은 자기의 육체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육체를 관리하지 못해서 병들어 쓰러지면 안 됩니다. 병상에 누운 환자가 달리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하고 싶어도 그 일을 못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아무쪼록 2023년에도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산뜻하게 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건강을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해도 결국 주님이 그 건강을 지켜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고로 주님께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건강할 때 그 건강한 몸으로 주님께 봉사를 좀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건강한 몸을 주신 것은 그 건강한 몸으로 주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 염려, 스트레스, 마음의 상처 등 각종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달려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염려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준다.”고 분명히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마6:33)

여러분, 인생을 혼자 너무 힘들게 살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들의 그 힘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친히 져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고로 지금 자기의 인생이 아주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면 신속하게 그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돌보고 있음이라.”(빌5:7)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것은 주님께 내 짐을 맡길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부모님이 내 짐을 대신 담당해줄 수 있고, 배우자가 서로의 짐을 나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친한 친구가 때로는 내 무거운 짐을 덜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내 짐을 져주실 수 있는 분은 결국 예수님입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인 예수님이 어떻게 오늘을 사는 내 짐을 대신 져주신다는 겁니까? 그건 그냥 종교적인 교훈을 통한 마음의 평화를 준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요즘 한창 유행하는 묵상이나 마음의 컨트롤을 통해서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주님이 내 짐을 대신 져주신다는 것은 단지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사상을 통해서, 혹은 마치 최면술을 걸듯이 우리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최면술은 최면술이고, 철학은 철학이고, 사상은 어디까지나 사상에 불과합니다.

사상과 철학으로만 가지고는 현실의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최면술을 통해 아무리 천국의 꽃길을 걸었어도 결국 그 최면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또다시 엄연한 현실입니다. 여전히 괴롭고, 힘들고, 아프고, 무겁습니다. 사실 철학과 사상과 종교를 가지고 우리들의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면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즉 구원자 예수님이 우리들의 짐을 져주신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 짐을 맡아줄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의 짐을 져줄테니 내게 맡기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근데 여러분, 참 신기합니다. 나의 그 어떤 문제도 주님은 그 짐을 가볍게 해줄 능력이 있습니다.

그 분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게 하신 분입니다.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입니다. 장님, 귀머거리, 앉은뱅이 등 수많은 병자들을 그 자리에서 고치신 분이십니다. 약을 쓰지도 않고, 수술을 하지도 않고 즉시 고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예수님 자신도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승천하셔서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오셔서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며 동행중에 있습니다. 그 분은 지금 우리가 당하는 문제와 사건들을 보시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분의 말씀 한 마디면 저와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무거운 짐이 벗겨집니다.

이런 능력의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애들아, 너희의 무거운 짐을 지금 나에게 맡겨라.”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지금 이 외국 땅에서 겪는 그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맡기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뜻한 마음으로 성전을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힘차게 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의를 행하기보다는 죄를 짓는 데에 더 빠른 존재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오래 해도 죄를 짓는 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속세를 떠나서 광야나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살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죄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주님의 빛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어느 한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한 집사님 가게에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시장에서 제법 큰 가게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가게에 도착했는데 마침 그 집사님이 가게 앞에서 그곳 시장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합니다. “아- 집사님! 안녕하세요.”

그러자 그 집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시장 분들이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야- 너 교회 집사야? 근데 너 왜 그 모양이야?” 그런 말을 듣고 그 집사님도, 그 목사님도 얼굴이 화끈해졌습니다. 도대체 그 집사님이 시장 분들에게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했을까요?

각자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그 집사님, 그 시장에서 소문난 싸움꾼일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 집사님, 시장 사람 모두가 다 아는 술꾼일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 집사님, 담배를 많이 피는 골초인지 모릅니다. 아마 그 집사님 소문난 욕쟁이인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 집사님 알게 모르게 죄 짓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는 죄를 짓는 약한 고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죄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유혹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딴 것은 다 괜찮은데 이런 경우에는 죄를 짓습니다. 며칠 전 제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범죄 성향에 대해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강도, 살인, 폭력 같은 죄는 남미 사람들이 강세입니다. 뭐- 툭하면 쏴죽입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유독 세계에서 1등을 하는 죄가 있습니다. 뭘까요? 다름 아닌 사기입니다. 아- 이거 왜 이래요? 한국 사람들 사기를 치는 것 보면 기가 막힙니다. 참 머리 좋습니다. 뭐- 신의 경지입니다.

그렇게 사기를 잘 친다는 것은 거짓말을 잘 한다는 뜻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위선자란 뜻입니다. 진실 되지 않다는 뜻입니다. 정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근데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는 이 사실을 그리 심각하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아- 여기는 정직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사회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의 영혼을 옭아맵니다. 달리기 선수의 발에 그물이 걸리면 어찌 달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힘센 동물들도 올무에 걸리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그대로 죽고 맙니다. 고로 죄의 올무에 걸리면 신속하게 회개하면서 그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는 존재이기에 날마다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달릴 수가 있습니다.

3. 인내해야 합니다.

이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저는 연습을 하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달리는 차 속으로 뛰어 들어가 죽고 싶은 생각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인생의 경주가 너무 힘이 들어 경주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죽고 싶은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2023년 구간을 달릴 때 분명히 힘든 구간이 있을 겁니다. “아-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고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멈추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실패자의 낙인이 찍힐 수 있습니다. 고로 그런 힘든 구간이 다가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힘들어서 죽겠는데 원하는 만큼 속도도 안 나고 아- 미치겠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뭐든 빨리빨리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입니다. 그것 때문에 인터넷 속도도 빠르고, 선진국 진입도 빠르고, 자장면 배달도 빠릅니다. 살기 참 편합니다.

근데 그게 나쁜 점도 있습니다. 잘 참지를 못합니다.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아- 여기는 왜 이렇게 늦은 거야?“ 하고 열이 쉽게 받습니다. 즉 기다리는 은사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 여기 캐나다 와서 마트에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한없이 길게 늘어서 있고, 마냥 기다립니다. 아- 저도 빨리빨리 한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 아버님이 평안도 사람입니다. 아시지요? 평안도 사람 급한 거? 저도 그 기질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뭐 어떡합니까? 여기는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민국에서 비자 나올 때 보면 한없이 기다립니다. “야- 이러다 세월 다 간다. 빨리 좀 내줘라.” 병원에서도 한없이 기다립니다. 아- 응급실이라고 급히 갔는데 거기서 기다리다 지쳐서 다시 돌아온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주여- 제가 이런 데서 살고 있습니다. 아시지요? 그렇지만 좋은 것도 있습니다. 뭘까요? 병원비 전부 공짜입니다. 할렐루야!

암튼 인생의 경주를 하다 보면 힘은 들고, 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때 십자가에서 그 조롱과 멸시를 참고 인내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론입니다. 지금은 인생의 경주를 모두 끝내고 천국에서 쉬는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먼저 간 우리의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들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도 앞에 있는 경주를 끝까지 잘 마쳐야만 합니다. 2023년 구간도 또 다시 힘차게 달려야 합니다. 힘들어도 인내하며 달려야 합니다. 아무쪼록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 골인지점인 천국에서 큰 환호와 박수를 받을 때까지 계속 잘 달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