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았는가?

날짜: 
2010/11/15
설교: 

삼상 16:7 무엇을 보았는가?
요즘은 옛날에 비해 한국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한국 사람들이 60세만 되면 '장수만세'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의 장수비결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평균 수명이 낮을 때에 한국의 한 여성이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 23세에 그만 남편이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임신 중이었던 여인은 유복자로서 딸을 낳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금세 재혼을 해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겠지만, 40년 전만해도 사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청상과부가 된 여인은 혼자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딸의 장래를 위해 헌신을 했습니다. 시장에서 온갖 장사를 하며 딸을 길렀습니다. 그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딸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오게 되었고 마침내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못배운 어머니와 많이 배운 딸과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딸은 어려운 일이 있거나 짜증스러운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다 쏟아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딸의 이러한 투정을 다 받아주었습니다. 희생과 인내의 세월을 산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느덧 딸도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생활 형편이 넉넉해지자 교외에 좋은 집을 마련하여 이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멀리 떨어졌고 교통편도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문득 딸은 늙은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정이 치솟았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장사하여 나를 입히고 먹이고 키워주었는데, 어머니가 학비를 대주어서 유학도 하고 공부를 마칠 수 있었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온 몸을 던져가며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딸은 이런 어머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다 사 드릴게요." 어머니는 웃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잘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단다." 그런데도 딸이 계속해서 다그치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집이 교회와 멀어서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쉽지 않구나. 나를 교회에까지 태워다주지 않으련? 돌아올 때에도 문제가 되니까 나와 같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구나."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딸도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핑계로 교회에 다니지 않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딸이 교회에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모녀를 환영했습니다. "권사님의 오랜 기도가 드디어 이루어졌군요."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목사님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교수님이 오늘 우리 교회 예배에 나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예배 시간에 개인을 치켜세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대접을 받고 보니 여 교수인 딸도 싫지는 않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동년배로 보이는 교회 여성들이 옆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크게 떠드는 바람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서로를 헐뜯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들도 별 수 없군." 딸은 불쾌한 기분으로 그 자리를 뜨고 2층 통로 쪽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장로님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의 기부입학을 청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평소에 적어도 대학만큼은 공정하게 실력으로 가야된다는 소신을 가진 그녀로서는 돈 있는 자들이 더하다는 생각에 치가 떨려 왔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는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체면상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 회의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습니다. 무슨 회의를 하는 모양인데, 생각이 어찌나 다른지 꽤 심각한 싸움인 것 같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입에 담는 말들이 세상 사람들도 잘 쓰지 않는 저속한 말들이었습니다. 딸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끌고 교회를 나오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마세요. 일요일이면 내가 경치 좋은 곳에 모시고 다닐 테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맙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머니는 항상 딸의 투정, 짜증까지 다 받아주던 그런 수용적인 분이었습니다. 딸에게 화를 내거나 혼내는 일이 거의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만큼은 어머니의 태도와 표정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단호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단호함에 주눅이 든 딸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교회에 하루 나와서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이 말에 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무식한 어머니가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외로워서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을 했었고, 소위 복만 비는 기복신앙의 소유자인줄 알았었는데 어머니의 말과 태도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신앙심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처럼 저속하게 문제만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가치를 바르게 볼 줄 아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바른 신앙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딸은 다음 주에도 계속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교인들의 좋지 못한 태도나 인격, 좋지 못한 말에도 쏠리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는 참된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다는 좋은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교회에 나와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불완전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의 죄의 성품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신앙은 분명히 잘못 가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 신앙의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맙니다. 일단 예수님을 믿기로 했으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인격이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습니다. 제 생각에 한참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속으로 분노가 끓어오르며 "어휴- 저런 것도 장로냐? 저런 것도 목사냐? 이제 우리 교회가 망하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순복음 교회가 망하지 않고 오히려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왜 이런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여러분,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닌 교회에는 불완전한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신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고, 회개시키고 있고, 보호해주시고 있기 때문에 망할 사람도 망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을 받고 잘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는 불완전한 인격의 소유자가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민족 반역자인 세리를 비롯해 몸을 팔아먹고 사는 창녀와 죄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들의 친구'라고 까지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사회적으로 지위적으로 하층민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과 같이 지내는 사람들만 볼 때에 오늘날의 부모님들은 아마 자기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애들아, 저런 나쁜 친구들과 사귀지 마라."
물론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인격이나 말과 행동이 변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인격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변화되지 않고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그 나빠진 것만 보고 교회에 다니다가는 반드시 시험에 들고 맙니다. 그 나쁜 것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 사람 보다 못난 사람, 나 같은 죄인도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를 너무 못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전 과목이 '가'였고, 한 과목만 '양'이었습니다. 당시 수우미양가로 채점하는 시대였으니 오늘날로 말하면 모든 과목이 낙제고 한 과목만 겨우 낙제를 면한 것입니다. 보통의 아버지 같으면 화가 나서 이렇게 소리쳤을 것입니다.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 왔니? 이 돌대가리 같은 놈아!" 이때 당돌한 아들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그러는데 아버지 닮아서 그렇데요."
그런데 이 아버지는 매우 신사적이고 고상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향하여 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아들아, 너무 한 과목만 집중해서 공부하지 마라." 즉 아버지는 낙제인 '가'를 본 것이 아니라 적게나마 가능성이 있는 '양'을 본 것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그 후 아들은 한 과목만 집중하여 공부하지 다른 과목도 신경을 써서 공부하여 '가'가 아닌 '양'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성도님들을 보면서 이렇게 성적이 좋지 못한 아들을 둔 아버지와 같은 경우에 처할 때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교회를 살피다가 보면 특정 쓰레기가 특정한 지역에서 계속 나옵니다. 누가 그 쓰레기를 버린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에는 청소하는 분을 고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목사가 쓰레기를 치우면서 어떤 때는 화도 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러나 금방 생각을 고치고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합니다. "주여, 이렇게 쓰레기라도 버릴 수 있는 성도들이 있으니 참 다행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성도라도, 똥을 싸는 아기들이라도 좋으니 많이만 보내 주십시오. 할렐루야!" 아마 제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벌써 화병이 생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괜히 열 받고 화가 나시는 분이 있습니까?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교회에서 화병이 걸려 일찍 죽습니다. 물론 일찍 죽어도 예수님 믿고 죽으니까 천국에 가므로 이래저래 좋지만 그래도 예수님 믿는 사람이 화병이 걸려 죽는 것은 참 보기가 안좋습니다. 예수님도 화병이 걸려서 천국에 온 성도들을 보면 아마 혀를 차시면서 "쯧쯧쯧, 왜 그렇게 열 받았니?"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있는 8명의 아들 중에서 이스라엘 왕을 뽑는 순간입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당시 이스라엘도 장남이 우선순위입니다. 장남 엘리압이 사무엘 선지지 앞에 나아왔습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볼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이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무엘아,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좋은 시각으로 행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