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얼굴이 두꺼운 편입니까? 얼굴이 두껍지 않은 편인가요? 한번 손들어 보실래요. 두 개 중 하나는 반드시 손들어야 합니다. 1번, 나는 얼굴이 좀 두꺼운 편이다. 2번, 나는 얼굴이 두껍지 않다. 결혼하신 분들에게만 다시 물어볼까요. 남편과 아내 둘 중에 누가 더 얼굴이 두꺼운 편인가요?
사지선다형입니다. 1번, 우리 집은 남편이 얼굴이 더 두껍다. 2번, 아내가 얼굴이 더 두껍다. 3번, 우리는 둘 다 얼굴이 두껍다. 4번, 우리는 둘 다 얼굴이 두껍지 않다. 다시 묻습니다. 저하고 우리 집사람 둘 중에 누가 더 얼굴이 두꺼운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해보세요. 1번, 목사님 얼굴이 훨씬 더 두껍다. 2번, 사모님 얼굴이 더 두껍다.(예- 잘 알고 있네요. 이건 대답하기가 너무 쉬었나요?)
그런데 여성분들은 결혼하고 나이가 먹으면 점차 용감해지잖아요. 특별히 한국의 아줌마들! 아- 얼굴 참 두껍습니다. 특히 전철에서 빈자리가 나오면 10m 멀리서도 쏜살같이 달려와서 앉으려고 합니다. 아- 도대체 아줌마들 왜 그렇게 용감하게 변하는 거예요? 험한 세상 환경에 적용하고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답답한 남편하고 살다보니 그렇게 변화가 된 겁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여러분, 아줌마들이 그렇게 얼굴이 두꺼워진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호르몬 작용 때문입니다. 여성이 나이가 먹으면 여성 호르몬은 줄어들고 남성 호르몬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줌마들의 얼굴이 두꺼워지고 씩씩하고 용감해지는 겁니다. 반면 남성은 나이가 먹으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고 여성 호르몬이 더 많아집니다.
그에 따라 점차 얼굴의 두께가 얇아집니다. 소심해집니다. 옛날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되면 TV를 보면서 순정 드라마나 좀 슬프거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주르르- 흘리기도 합니다. 즉 남성이 점차 여성화되고, 여성은 점차 남성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먹으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반대가 되고, 역전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자어로 된 사자성어 중에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권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을 들어보신 분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세요. 두터울 후, 얼굴 안, 없을 무, 부끄러울 치, 자를 씁니다. 해석하면 얼굴이 두꺼워서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 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얼굴이 금강석 같이 단단하다는 겁니다.(겔3:9) 이런 표현들은 회개를 하지 못하는 강퍅하고 뻔뻔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한자어로 된 사자성어 중에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 인, 낮 면, 짐승 수, 마음 심, 자를 씁니다. 해석하면 사람의 얼굴을 하였으나 그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입니다. 즉 겉은 그럴듯하게 좋아보여도 속은 아주 좋지 못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보통 잔인하고 교활한 조폭이나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에게 쓰는 말입니다.
자- 이상 서론이고요. 오늘의 주제는 ‘부끄러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창피하다. 수치스럽다. 쪽팔리다.’라는 뜻입니다. 이와 반대말은 ‘자랑스럽다. 떳떳하다.’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란 말은 때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쓰이기도 하고, 반대로 부정적이고 나쁜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움이 긍정적이고 좋은 뜻으로 쓰일 때는 ‘양심이 살아 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뜻이고, 부끄러움이 부정적이고 나쁜 뜻으로 쓰일 때는 ‘양심이 죽었다. 뻔뻔하다. 얼굴이 두껍다.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고 도리어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부끄러워하는 것은 안 좋은 현상이고, 반대로 심히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도리어 뻔뻔하게 자랑하고 다니는 것도 매우 안 좋은 행동입니다.
얼마 전 쿠바 주재 북한 외교관인 ‘리일규’ 씨가 탈북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국적이 북한(North Korea)이라고 말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아-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고급 외교관인데 방글라데시에까지 가서도 식량을 달라고 구걸할 정도니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북한 외교관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식량 원조를 받아서 북한으로 보내는 겁니다. 한번은 북한 외교관이 방글라데시에 가서 그 나라 정부 관료들에게 식량 원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방글라데시 관료들이 북한이 자신들에게 식량 원조를 해주겠다는 뜻으로 알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라 방글라데시가 북한에게 식량 원조를 해달라고 사정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방글라데시 관료들이 “세상에- 우리 보고 식량 원조를 해달라는 나라가 있다니!” “우리 방글라데시 나라가 생긴 이래 우리 보고 식량 원조를 해달라는 나라는 너희가 처음이다.” 하며 “아-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가 있구나!” 하고 크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아- 그 말을 들은 북한 외교관들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반면 우리가 여기 캐나다에 살면서 가끔 외국인들이 우리의 국적에 대해 묻습니다. “North Korea? or South Korea?" 이때 우리가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Of course, South Korea." 그리고 덧붙여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You know, Samsung Hyundai, Kia, LG. They are all of the Korean companies. 할렐루야!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뭔가를 부끄러워했던 적이 몇 번은 있었을 겁니다. 혹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에 급똥이 나와서 바지에 똥이 묻어 심한 냄새를 풍겼을 때가 있지는 않았나요? 어때요? 그때 너무나 창피했지요? 그리고 사춘기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부모와의 면담을 위해 엄마 아빠를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부모를 부끄러워해서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반면 부모의 경우는 어떤가요? 자신의 자녀가 아무리 못나고 장애가 있을지라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항상 자기 자녀 편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경우는 어떤가요? 자녀와 달리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둘 중에 하나겠지요. 배우자가 자기에게 잘해주고 마음에 들면 “나는 내 아내가(남편이) 자랑스럽다.” 하고 떳떳이 말할 테고, 혹은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들면 “남편이(아내가) 부끄럽다.“고 속으로 생각하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왕이면 자랑스러운 남편과 아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배우자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그 하나님의 선물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내 아내가(남편이)매우 자랑스럽다.“ 아멘! (아직도 노멘입니까? 노멘이 반드시 아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좀 바꾸어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자랑스럽습니까? 예수님이 부끄럽습니까? 제가 대학교 시절 때 저의 아버님의 건축현장인 평택에 갑자기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용돈이 급해서 찾아간 겁니다. 저의 아버님이 속으로 “아- 저 녀석 또 왜 왔어? 분명히 용돈 달라고 온 걸 거야.” 하면서도 겉으로는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 때가 되자 “아들아- 밥 먹었냐?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러면서 그곳 공사장에 있는 식당에 갔습니다. 드디어 시킨 음식이 나오는데 제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식당에서 과연 아버님이 식사기도를 떳떳이 하시는가?“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두 눈을 감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쓰윽- 쓰다듬으며 마는 겁니다.
아- 식사기도는 해야 하는데 식당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부끄러워서 못하시고 그냥 얼굴 한번 쓱- 쓰다듬고 그걸로 식사기도를 때우는 겁니다.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뭐- 저도 그때 별로 믿음이 없었으니까 그냥 아버지 따라서 손으로 얼굴 한번 쓱- 쓰다듬고 같이 밥 먹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자전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면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러워 마시고 도리어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어디서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여러분, 크리스천이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복음입니다. 하루는 저의 가족들이 제 여동생 대학교 졸업식 때문에 인천 가는 전철을 같이 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철 안에서 하나님이 저를 감동시키셨습니다. “종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나 그곳 전철에서 한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런 저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며 기도를 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여동생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중에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떴습니다. “아- 오빠가 또 이러는구나! 여기 내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아- 창피해!” 하는 마음에서 자리를 뜬것 같습니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그게 뭐가 창피하니?” 여러분, 술 취하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거짓말하고, 죄 짓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창피하고 부끄럽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참 많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도 적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매우 부끄럽게 생각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가 자랑스럽게 교회 외부의 가장 꼭대기에 있고, 강대상 중앙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여성들이 십자가를 목걸이로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사형수들의 형틀이었습니다. 성경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신21:23)
그러니까 당시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님을 믿고 전한다는 것은 큰 부끄러움이었고, 큰 고난이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진들은 부끄러움은커녕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님과 그 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사도 바울도 고백합 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딤후1:12) “디모데야,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여러분, 예수님은 나와 너를 살리기 위해 그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영광스런 분이 벌거벗겨 나무에 매달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너와 나를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며 우리를 향해 나의 친구라 부르고(요15:15), 나의 형제라 부르고(히2:11), 나의 신부라고 부릅니다.(요3:29)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하는 우리들에게 약속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10:11, 롬9:33)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34:5)
기도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부끄럽지 않게 하시옵소서.(시25:2)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옵소서.”(시31:1)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게 하시고,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이름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