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은 사람, 복 있는 사람

날짜: 
2007/04/15
설교: 

창12:1-4 복 받은 사람, 복 있는 사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무슨 단어일까요? 젊은 사람들은 ‘사랑(Love)’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몸이 약한 분들은 ‘건강(Health)’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Money)’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글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복(Blessing)’이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뭐라고 인사를 합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얼마나 ‘복’을 좋아하는지, 베개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수저에다가도 ‘복’자를 새겨 넣고, 심지어 화장실 안에까지도 ‘복’자를 그려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오복(五福)을 중시할 정도로 ‘복’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을 좋아하는 것은 비단 동양에서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 캐나다에서 “God Bless you!"라고 인사했을 때, 화내는 사람 보셨습니까? 아니면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사람 보셨습니까? 저는 10년 동안 캐나다에서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God Bless you!"하고 말하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Thank You."하며 반가운 표정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Blessing(복)’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남자나 여자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이 자리에 ‘복’을 싫어하시는 분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을 좋아하고, 또 복 받기를 원합니다. 또 대부분의 종교들이 ‘복’을 지향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복 받는 비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사실은 ‘복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할 때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복‘에 대한 가사가 많이 나옵니다. 찬송가 28장은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하며 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489장에는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고 하며 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490장은 “영생의 복 받기 원합니다.”라고 하며 역시 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자세히 살펴보면 복에 대한 말씀들이 굉장히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119절에 걸쳐 130여 번 이상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복 받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몇 사람을 꼽아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 다윗, 솔로몬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복 받은 인물들을 모델로 삼고 기도합니다.
사업에 자꾸 실패하는 성도는 “하나님, 저도 이삭과 같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또 선거 때마다 낙선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저도 요셉처럼 위대한 정치가 되어 멋지게 쓰임 받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어떤 성도는 “우리 아이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도 솔로몬과 같은 지혜로운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또 어떤 성도는 “하나님, 누구누구처럼 복 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하며 먹을 것 먹지 않고, 마실 것 마시지 않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다.
어떤 성도는 21일 다니엘작정기도, 40일 겟세마네작정기도, 100일 작정기도, 등의 이름으로 작정하며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 받는 사람’ 보다, ‘복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편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좆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복 있는 사람’이란 부분입니다. 언뜻 보면, ‘복 받은 사람’과 ‘복 있는 사람’이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물질의 복도 받고, 건강의 복도 받고, 자녀의 복도 받고, 만남의 복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복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브라함이 복 받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복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2절입니다. 2절에 언급한 ‘네게 복을 주어’라는 부분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두 부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개역성경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번역하여 놓았지만, 개역개정판에는 원어에 좀더 가깝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더 이해가 쉽습니다.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올 때는 복은커녕 오히려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복 받은 사람’인 동시에, ‘복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과 열방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 받은 사람’인 동시에,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복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줄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의 록펠러라는 분은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55세 때에 불치병으로 1년 이상을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병원 로비에 걸려 있는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바로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가 그러한 결심을 하고부터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록펠러 재단을 통해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For Get),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Forget)가 된다. 그러나 이웃들에게 베풀면(For Give),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Forgive)를 받고 덤으로 더 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게 하면 화가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면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도 풍부하여 ‘축복의 호수’라고 불리고 있는 반면, 사해는 염분이 많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 Dead Sea(사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두 호수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주위의 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다른 강들로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사해는 주위의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뜨거운 중동지방의 태양열로 인해 물은 증발하고 소금만 쌓여 염해가 되었습니다. 사해는 ‘복을 받는 호수’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복이 있는 호수’입니다. 복을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으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면 복은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실제로 주는 사람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장수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남에게 주는 사람이 고통과 아픔을 적게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스트레스도 적고, 질병에도 덜 걸린다는 것입니다. 금연보다도, 주 4회의 규칙적인 운동보다도 구제가 장수에 더 좋다고 합니다. 미시간대 학자들은 5년간 400명의 노인 부부들을 조사한 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훨씬 더 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 책임자인 브라운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1999년 캘리포니아 대에서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와도 일치합니다. 이 연구에 의하면 2개 이상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5년간 죽을 확률이 놀랍게도 63%나 줄어든다고 합니다. 결국 남을 돕는 행위는 자기를 돕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것을 무슨 법칙이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산울림 법칙’ 혹은 ‘부머랭 법칙’(Boomerang: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호주토인의 무기)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면 보낼수록, 더 많은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면 줄수록, 후히 되어 누르고 넘치도록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라는 사람도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덩어리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곳에 하나님이 복이 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때문에 잘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가게마다, 식당마다, 사업장마다 흥왕케 되는 복이 임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멈추게 해서 썩히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보냄으로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받은 사람’인으로 만족하지 말고, 받은 복을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보내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이 있다면 물질로, 시간이 있다면 시간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도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면 복음을 전함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