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날짜: 
2016/03/26
말씀: 
계20:4-6
말씀구절: 

...

설교: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말을 듣고도 전혀 마음의 감동이 없는 분이 있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대꾸하는 분도 있습니다. “부활이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특히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뭐가 그리 대수롭습니까?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던지, 열흘 후에 살아났던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나는 지금 이 외국 땅에서 먹고 살기 바쁘고, 무한 도전, 아빠 어디가? 응답하라 88, 카톡, 게임, 스마트 폰.... 뭐 이런 것에 솔직히 더 관심이 있는데.... 부활이란 것은 할 일 없는 예수쟁이들이나 광신자들이 떠벌리는 토픽이 아닙니까? 그리고 부활이 있으면 어떻고 부활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나는 부활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분들조차도 부활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래 전에 여기 캘거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그 분이 부활절에 성도님들에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부활, 그것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교회 많은 분들이 시험에 들어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목사님도 그 교회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번 따져봅시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이 질문에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 예수님 믿으면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예수님 믿으면 넉넉하게 부자로 삽니다. 예수님 믿으면 가정이 튼튼하고 자녀들이 훌륭히 자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위기에서 구출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행복에 넘칩니다.”
물론 이 대답이 틀린 대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100% 맞는 대답도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도 건강하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어도 가난한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어도 자녀들이 속 썩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어도 교통사고 나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어도 매번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유 중에 이 대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 이 대답은 100% 맞는 대답입니다. 우리가 크게 아멘해도 되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이 이 대답이 맞는 대답이지만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다른 이유, 즉 건강, 물질, 형통, 자녀, 안전 같은 이유들은 당장 이 땅에서 내가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영생과 부활은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단 죽어서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고요? 봐요? 아직은 팔팔하잖아요? 그런 죽음 같은 재수 없는 이야기 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부활?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잖아요. 아- 머리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어찌 들으면 참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외국 땅에서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고, 당장 이 세상의 일들을 처리하기도 바쁜 세상에 너무도 장래 일에 대하여, 그리고 생각하기도 싫은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 인생을 너무도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 인생 좀 단순하고 쉽게 살고 쉽습니다.
그래요. 저도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리고 인생의 나이가 점차 먹다 보니 복잡한 것 싫습니다. 스마트 폰도 자꾸 새로운 것이 나와도, 그리고 공짜로 새 폰을 준다고 자꾸 메일이 오고 귀찮게 해도 새로운 것으로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새것 사면 다시 그것 세팅해야 되고... 아- 번거롭고 복잡한 것 싫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나 부활 같은 장래의 먼 일에 대하여는 그냥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이라는 날이 어떤 날입니까?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절에 부활에 관해서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님이 있다면 아마 이상한 목사님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아마 예수님이 좀 섭섭해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죽음과 부활에 관한 토픽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오늘 만큼은 좀 인내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묻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맞습니까?” “아니요. 저는 안 죽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기에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막 정신병원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중증의 환자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안타깝지만 이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합니다. 맞습니까?” 이 질문은 좀 까다로운 질문인데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은 불신자까지도 나중에 다 부활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아니요.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부활을 합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 그리고 둘째 사망과 둘째 부활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불신자나 신자나 다 육신이 죽습니다. 육신의 사망은 의학적으로는 심장이 멈추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불신자나 신자나 모든 육체는 썩습니다. 그러나 이때 신자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도달하지만, 불신자의 영혼은 음부(히브리어로 '스올', 헬라어로 '하데스')에 들어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은 첫째 사망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천국과 음부로 운명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첫째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로서 썩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서 천국에 가 있던 영혼과 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생명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에 부활한 육체는 지금과 같은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육체입니다. 즉 다시는 썩지 않는 육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육체, 병들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육체,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육체, 추위와 더위도 이기는 영화로운 육체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러한 존재가 단지 영혼만을 뜻하는 아니고, 영혼과 함께 육체가 함께 결합된 변화된 육체라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불신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들의 썩었던 육체와 음부에 간 영혼이 다시 결합하여 재차 사망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둘째 사망을 당하기 위해서는 불신자들의 육체도 다시 살아나서 영혼과 합해야만 합니다. 이를 가리켜 둘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사망의 부활’ 또는 ‘심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볼까요. 옛날 우리 한국 역사에 보면 이미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사람의 시체를 꺼내어서 다시 한 번 칼로 목을 자르고, 그 시체를 불에 태워서 죽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한자어로 ‘부관참시(剖棺斬屍)’라고 합니다. 즉 한 번 죽었던 사람을 다시 꺼내서 또 한 번 심판을 하여 두 번 죽이는 겁니다. 성경적인 표현으로는 둘째 부활이요,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나 첫째 사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을 당하기 위해서 둘째 부활을 하지도 않습니다. 첫째 부활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첫째 사망도 당하고 둘째 사망도 당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즉 둘째 부활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장소인 불과 유황이 타는 곳인 지옥(헬라어로 '게헨나')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 제가 전하는 말씀은 성경의 기초가 없거나 초신자들에게는 거의 공상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목사님이 성도님들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어야할 가장 중요한 성경 지식 중의 하나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다시 한 번 반복해 봅시다. 첫째 사망이 무엇이지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는 좋든 싫든 불신자나 신자나 다 당하는 사망입니다. 첫째 부활은요? 신자들의 생명의 부활로서 신령한 육체와 영혼이 다시 합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무엇이지요? 불신자들이 당하는 것으로서 영혼과 육체가 합하여 다시 한 번 사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활은요? 불신자들의 두 번째 사망을 받기 위하여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도 다 좋은 것이 아니고, 첫째 부활은 좋은 것이고 둘째 부활은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20:6)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이 세상의 70-80의 인생이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만약 이 세상의 인생이 다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큰 사기를 당하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즉 인생은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 부활합니다. 예수님처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지만,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 둘째 사망을 당하는 자에게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때가 되면 “아- 예수님 믿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하고 절실하게 느끼고 나를 예수님 믿게 만들어 준 하나님께, 그리고 나를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해 준 전도인에게 큰 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살면 얼마나 오래 살고, 또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그리고 또 성공을 하면 얼마나 성공을 하겠습니까? 그것 다 키를 재보면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그때 내가 첫째 부활에 참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진짜 세상 말로 땡잡은 것이고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 춤을 추고 기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강제로 둘째 부활을 당하는 사람은 인생 끝장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습니다. 즉 예수님 믿고 첫째 부활을 하는 사람은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이고요, 심판을 위해 둘째 부활을 당하는 사람은 재수 오지게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이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설교 제목인 ‘부활,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됩니까? 안됩니까? 100% 관련이 되는 겁니다. 즉 첫째 부활이 없으면 인생 망한 것이고, 둘째 부활을 강제로 당해도 인생 망한 것이고, 비록 첫째 사망을 당해도 괜찮아요. 첫째 부활이 있고, 그 첫째 부활에 참예하면 인생은 진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째 부활을 누가 줍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 믿는 것이 결국 행복이고, 예수님 믿는 것이 결국 성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는 이 외국 땅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했어! 나는 앞으로도 성공할 자신이 없어!“라고 생각하며 인생이 좀 우울하신 분이 있습니까? 괜찮아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결국 다 죽어요.
그러나 그 후에 부활이 인생을 결정하는 겁니다. 모두가 부활해요. 그러나 오늘 여기 계신 사랑하는 분들이여! 반드시 예수님 믿고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전후좌우 옆에 분에게 서로 인사합시다. “당신은 반드시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복된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