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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히 감사를 많이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1년에 한번 있는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도 제대로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추수감사절만큼은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과 함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즉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흐뭇해지며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약속된 축복을 허락하시고 준비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애급의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에는 그들에게 독사가 나와서 물었고, 불이 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살랐고, 결국 광야에서 한세대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게 되고 결국 약속된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불평은 마귀를 끌어들이는 초청장이요, 감사는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초청장입니다. 마치 고약하고 썩은 냄새가 나면 파리나 구더기가 들끓고, 반면 향기로운 냄새가 나면 나비나 벌이 모이는 것처럼 마귀는 불평의 냄새를 맡고 들어오며, 하나님은 감사의 향기를 맡고 임재 하시게 됩니다.
고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늘 느끼며 사는 사람은 감사가 충만한 사람이요, 마귀에게 속아 살고, 마귀에게 눌려 살고,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사는 사람은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불평하는 사람은 마귀의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분위기가 좋아지고, 불평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당연히 분위기가 나빠집니다.
좋은 교회란 감사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요, 좋은 가정이란 감사하는 식구가 많은 가정이 좋은 가정이요, 좋은 국가란 감사하는 국민이 많은 국가가 좋은 국가입니다. 반면에 불평하는 성도가 많으면 나쁜 교회요, 불평하는 식구가 많으면 나쁜 가정이요, 불평하는 국민이 많으면 나쁜 국가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불평보다는 감사가 좋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 것은 웬일일까요? 디모데후서 3:2에 보면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말세가 되면 불평의 전염병이 너무도 세게 돌아서 나도 모르게 그 전염병에 걸려 불평의 기침을 심하게 해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이 그만 습관화가 되고, 그 불평이 인격에까지 자리를 잡으면 그 사람은 결국 불행한 사람이 되고 남도 불행으로 몰아가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불평을 떨쳐버리고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성령 충만 받아야 되고, 날마다 기도해야 되고 말씀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불평을 감사로 바꾸는 몇 가지 예화를 소개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당하는 오늘의 불평의 제목조차도 감사로 바꾸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 페르시아의 사니아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인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이 없어 신발을 사지 못하고 맨발로 걸어 다니게 되자 그만 처음으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왜 가난한 부모 밑에 자라서 신발도 못 신고 다닐까?”
그가 이렇게 불평하며 걷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보니 다리가 없는 한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순간 그는 이렇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리가 없는 저 사람에 비하면 신발이 없지만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즉 자기보다 더 나쁜 형편에 놓여있는 사람을 보면서 불평의 조건을 감사의 조건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통장에 1000불이 있는 사람은 통장에 1불도 없는 사람을 보고 감사할 수 있고, 조그만 질병에 걸린 사람은 큰 질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고, 자녀가 하나밖에 없어 불평인 사람은 자녀가 하나도 없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고, 자녀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고, 캐나다에 사는 사람은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무엇이 없어서 불평하십니까? 자기보다 더 없는 사람을 보고 감사로 돌리십시오. 혹시 무엇이 나빠서 불평하십니까?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을 보고 감사로 돌리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분명 당신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감사의 조건을 주님께 고백하는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아주머니에게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매일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주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부인이 술에 곯아 떨어져 자는 남편 옆에 앉아서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신세타령을 하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감사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해도 감사할 것은 없지만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감사할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내가 과부보다는 낫지 않은가? 저렇게 술에 골아져 꽥꽥대는 남편이라도 있으니 도둑이 들어오지 않지 않는가? 만약 이런 남편이라도 없이 혼자 있으면 이 밤에 얼마나 무섭겠는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편이 목이 타서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인상 짓고 울고 있어야 할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지 뭡니까? 남편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으니 부인은 구체적으로 고맙고 감사한 것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내일부터 교회에 나가 줄게!” 하더랍니다.
즉 감사하는 아내와 감사하는 남편이 사랑을 받으며, 감사하는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전도를 잘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결국 하늘나라를 가꾸는 귀한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늘나라는 감사하는 사람을 통해서 가꾸어지는 것이지 결코 불평하는 사람을 통해서 가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어느 한 성도님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만원이 되어 비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흑인 여자가 아이를 다섯을 데리고 버스를 올라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옆으로 다가와서 자기를 자꾸 밀어냈습니다. 아이들은 떠들고 냄새는 나고 흑인 엄마의 고함소리가 옆에 있는 성도님을 너무도 괴롭혔습니다.
이 성도님의 마음에 화도 나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폭발 직전에 있는데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이럴 때에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얼마간을 생각하다가 그는 이렇게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런 여자가 내 마누라가 아니라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같이 살다보면 서로에게 그리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밥해주는 것도 당연하고, 청소해주는 것도 당연하고, 돈 벌어주는 것도 당연하고... 저의 경우에는 요즘 설거지를 자주 해주다보니까 처음에는 우리 집 사람이 “고마워요.” 하고 굉장히 감사를 하더니 얼마 전에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냥 “수고했어요.” 하고, 지금은 “아- 왜 설거지를 제대로 못 했어요?” 하고 핀잔을 줍니다.
혹 이 말을 듣고 우리 여성분들이 “그것 봐요. 목사님도 설거지를 해주는데 당신은 뭐예요?” 하고 불평하는 분이 있다면 오늘의 주제 파악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남편이 설거지를 못해줘도 다른 조그만 것을 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밥상을 안차려 줄지라도 남편은 괜히 불평하지 말고 “주여,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아내를 위해 차려준 밥상보다 아내가 나를 위해 차려준 밥상이 많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들을 보면 속 썩이는 성도님들 때문에 불평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를 하다보면, 더구나 이민 목회를 하다보면 속 썩이는 성도님이라도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요즈음 한국이나 이민 교회의 개척 교회를 보면 성도님이 없어서 교회의 문을 닫고 목사님들이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로 목사님들은 성도님들이 속을 썩일 때에도 오히려 행복을 느끼며 “주님, 속 썩이는 성도님이라도 보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려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성도님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지내는 것보다 “하나님, 저 양반을 목사 시키시고 나를 목사 시키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만약 목사가 되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고 감사의 제목을 찾으면 좋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인천의 어느 교회 목사님은 매주일 설교 전 기도를 하면서 날씨에 대해 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 화창한 날씨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이 화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시 비가 오면 “주님, 적당한 비를 주셔서 대지를 적시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주님의 은혜의 단비로 채워주시옵소서.”
이렇게 날씨에 대한 감사기도이기 때문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마철 어느 주일날 11시에 예배가 시작되지 1시간 전부터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계속 쏟아진 비 때문에 11시 20분이 지나도 3백 명쯤 모이는 성도님들이 50명밖에 모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오늘도 우리 목사님이 날씨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릴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오셔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일 년 52주 동안 오늘 한 주일만 장대비를 주시고 다른 주일날은 장대비를 주시지 않았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결론입니다. 불평할 것도 감사로 돌릴 줄 아는 그런 마음, 그런 시각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사실 불평할 것도 감사를 하면 웬만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로 오늘만큼은 불평스러운 것도 감사해봅시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주님, 그것도 감사하고 이것도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