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날짜: 
2005/08/22
설교: 

마5:43-48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돌이와 순이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둘은 짝꿍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돌이가 순이에게 편지 한 장을 써서 건네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얘- 순아, 나는 너를 좋아해. 내가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니 우리 결혼하자."
말하자면 돌이가 순이에게 청혼편지를 쓴 셈입니다. 순이는 그 편지를 받고서 밤새도록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답장을 적었습니다. "얘, 돌아. 나도 너 좋아하는 것 알고 있지?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너와는 결혼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 집안은 모두 가족들하고만 결혼을 했거든. 우리 엄마는 우리 아빠랑 결혼하셨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랑 결혼하셨어. 그리고 우리 이모도 우리 이모부랑 결혼하셨어. 이처럼 우리 가족은 다 집안끼리만 결혼했잖아. 그런데 너랑 나랑은 좋아는 하지만 친척도 아니고, 남남이잖아?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돌아, 정말 미안해. 순이로부터."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여섯 살짜리 유치원 아이의 수준으로 생각하면 자기 집안은 다 가족들끼리만 결혼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되기 전에 모두 남남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남남이었지만 서로 사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지붕 밑에서 가족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 유치원생 순이의 사고방식은 결혼은 꼭 가족끼리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스운 생각입니다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즉 사랑에 한계를 두고 국경선을 긋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사랑할 수 없고, 저 사람은 저래서 사랑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이런 사람은 자기 외에는 사랑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 편협한 사람, 배타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나와 같은 고향이 아니면 은근히 배척하고, 나와 같은 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고, 나와 같은 교단이 아니면 서로 경쟁을 하려고 하고, 나와 같은 교회가 아니면 비난을 하려고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친절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품지 않으면 틀리다고 하고, 나와 같은 피부를 갖지 않고, 나와 같은 언어를 쓰지 않으면 인종차별을 하고, 이리저리 경계를 긋다보니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 좁아지고, 사랑이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편협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모두 이방인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이라고 해도 “나는 바리새파다, 나는 사두개파다, 나는 엣세네파다, 나는 열심당원이다.” 하고 파당을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 중에 고린도 교회도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누어서 서로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이기적이었고 서로 배타적이었습니다. 전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에 철저한 국경선을 그어 놓은 것입니다. 바울파가 아볼로파를 사랑할 수 없고, 게바파가 그리스도파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적 은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언하는 자는 못하는 자를 멸시했고, 예언하는 자는 못하는 자를 무시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은사까지도 사랑의 국경선을 긋는 데에 쓰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움 속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13)
여러분, 사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에 대해서는 모두 한마디씩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진작 사랑의 이론과 실천 단계에는 많은 차이와 갭이 있어 사랑이 쉽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서로를 사랑하면 이 땅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에 국경을 두기 때문입니다. 인종이 틀리므로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고향이 틀리므로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틀리고 당파가 틀리기에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직업이 틀리고 학벌이 틀리므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인기리에 막을 내린 드라마가 있습니다. 다른 아닌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에 보면 삼순이라는 여주인공이 나옵니다. 그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여주인공은 몸무게를 7kg이나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라마에 보면 그 여주인공은 옷도 세련되게 입지 않고 아주 털털하게 입고 다닙니다. 헤어스타일도 손이 많이 가지 않은 평범한 스타일입니다. 한마디로 삼순이처럼 꾸미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삼순이는 특별히 좋은 대학도 나온 것도 아닙니다. 직업도 빵 만드는 기술자입니다. 그리고 집안도 방앗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은 좋은 학벌의 소유자입니다. 인물도 삼순이보다 훨씬 잘 생기게 나옵니다. 거기다가 요즘 여자들이 좋아하는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큰 빌딩을 가지고 있고 아들인 남주인공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거기다가 피아노도 잘 칩니다. 스포츠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주인공은 평민이요 하녀라면 남주인공은 귀족이요 왕자입니다. 이 둘은 누가보아도 사랑하는 연인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사랑하려고 해도, 결혼하려고 해도 주위의 반대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합니다. 왜 사랑 하느냐고요? 그렇게 묻지 마십시오. 사랑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동서양 어느 곳이든지 사랑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기생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도 역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역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요, 앞으로 나오는 수많은 드라마 역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주제를 가지고 제작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왜 이웃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왜 자기가 좋아하는 자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왜 자기와 생각과 사상이 같은 자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하는데 너무 이것저것 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는 것처럼 사랑을 하는데 국경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협적으로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편협적인 사랑은 안 믿는 사람들도 하는 것이요, 동물들도 하는 사랑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하려고 하면 보다 넓게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하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뜻합니다. 나의 자존심을 뭉개고, 나의 앞길을 망친 사람을 뜻합니다. 나를 할퀴고 때린 사람을 뜻합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원수들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쉽지 않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께 대답하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지금 저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는 아직도 그 원수만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를 사랑하기에는 저는 아직 인격이 덜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저는 도저히 그 원수를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대답이 솔직한 우리들의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문 4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즉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은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입니다. 원수사랑은 인간에게 속한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고로 하나님과 같이 닮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노력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그런 원수를 사랑할 수 없어요“ 하고 한계와 국경을 정해 놓지 말고 한번 시도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도를 하면 하늘에 상급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에서 상급을 많이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닮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한계를 짓는 편협한 국경선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에는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자칫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의 역사로 인하여 퇴색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저의 바람은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가 한편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 백성들 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두 집안이 서로 화해한 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말을 영어로 직역하면 ‘There are no borders between the country in love.'라고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좀더 의역을 하면 ‘Love does not care any borders.(사랑은 국경을 무시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인종을 초월해야 하고, 학벌을 초월해야 하고, 사상을 초월해야 하고, 당파를 초월해야 하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야 하고, 사상과 생각을 초월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국경을 초월하는 사랑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경을 초월하는 사랑이 성립이 되려면 그만큼 희생이 따라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모두 국경을 초월하여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요, 국경을 초월하여 사랑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말의 뜻은 우리가 한국이라는 국경을 떠나 이곳 캐나다에 이민이나 유학 혹은 방문을 왔기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의 국경을 초월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 분이 국경을 초월하여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이 단지 유대인으로 오셔서 유대인만 사랑하시고 유대인만 구원하셨더라면, 우리는 그 사랑의 편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받았기에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같이 힘을 쓰십시다. 사랑하기에 힘든 사람조차도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다. ‘도저히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라는 사랑의 조건과 사랑의 국경을 스스로 허물어 버리십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 노력하십시다. 그래서 너와 내가 그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애야, 네가 나의 사랑을 실천하느라고 애를 많이 섰다.” 하고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