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이 있기에 아직도 나는

날짜: 
2022/02/03
말씀: 
막9:2-8
말씀구절: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설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다.” 즉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존재하지만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모여 사회라는 집단(group, 공동체)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확인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작게는 그 그룹이 가정이 될 수 있고, 학교, 직장, 교회, 국가, 세계라는 좀 더 넓은 그룹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룹(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어찌 보면 상당히 피곤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그룹(단체) 생활을 힘들어 합니다.

즉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하고, 어떤 사람은 같이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동물의 경우도 개나 사자들은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반면 쿠거나 호랑이들은 혼자 활동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동서양의 차이도 서양은 개인주의가 좀 더 인정되는 문화고, 동양은 단체주의가 좀 더 인정되는 문화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 사람들이 단체 회식을 갔습니다. 그곳이 뷔페식당이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개인적으로 가져다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뷔페식당이 아니라 주문을 해서 먹는 경우에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체로 음식주문을 해야 할 경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삼겹살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단체 회식에 삼겹살 파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삼겹살을 싫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아무리 단체 회식이라도 서양에서는 개인적으로 따로 주문하는 것을 허용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한국과 동양에서는 단체 회식에 개인적으로 따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반사회적 행동으로 생각하거나, 분위기를 깨는 사람으로 몰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회사의 상관이 삼겹살을 너무 좋아해서 삼겹살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그 밑에 있는 부하직원이 자기는 삼겹살이 싫어서 딴 것을 먹자고 하기가 상당히 눈치가 보입니다. 한국 사회에 젖어있는 단체주의와 권위주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군대의 경우는 부대장의 취향에 따라 회식 메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메뉴에 부하들이 싫다고 토를 달수가 없습니다. 그저 아멘 하고 좇아가야 합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자유가 무시되는 단체 분위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경우나, 자기가 별로 하기 싫은 행동을 강요받는 경우가 단체(공동체)에서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단체생활을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단체 활동에서 오는 소속감이나 그 안에서 대화하고 지내는 것과, 그 안에서 얻는 유익 때문에 단체 활동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혼자 개인적으로 지내는 것이 더 편합니까? 아니면 어떤 그룹 속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합니까?

물론 그 그룹이 자신과 궁합이 잘 맞으면 그 그룹을 선호할 것이고, 그 그룹이 자신과 잘 맞지 않으면 그 그룹을 싫어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아리 모임 같은 취미 활동 모임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운동모임을 좋아할 것이고, 운동 중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종목에 따라서 그 모임도 달라질 것입니다.

반면 운동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서나 요리, 바둑, 꽃꽂이가 취미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찬양하고, 혼자서 성경 보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찬양하고, 같이 성경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처음 발을 디딘 새신자의 경우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보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은 기도할 줄도 모르고, 찬송가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데 그런 것을 교회의 공동체에서 강요받으면 그 공동체를 싫어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그룹 활동이 새신자가 편하도록 세상적으로 술을 마시고, 같이 컴퓨터 게임하고, 같이 세상 잡담만 하고, 같이 놀러만 다닐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들 중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이 찬란한 모습으로 변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도 펼쳐졌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습을 보고 너무 황홀하고 좋아서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여기다가 초막을 짓고 같이 삽시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거기가 좋아도 그렇지, 베드로는 이미 결혼한 사람인데 자기만 따로 산에서 살면 처자식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

아마 베드로가 이 당시 아내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지, 혹은 가족들을 돌봐야 할 책임감을 잠시 까먹었는지, 혹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이런 황당한 제안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식한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다간 우문우답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예수님이 마을로 내려가시자 베드로도 뻘줌하여 예수님을 따라 산을 내려와 마을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서는 왁자지껄 돛대기 시장처럼 난리가 났습니다. 아- 복잡합니다. 산에서 체험한 황홀한 모습과는 영 딴판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보통 절간은 사람들이 없는 깊은 산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보통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절간은 늘 조용하고, 교회는 늘 시끌벅적합니다. 즉 불교는 복잡한 속세를 떠나는 특징이 있고, 기독교는 도리어 복잡한 세상 속에 파고들어가 사명을 감당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이름이 김원효, 원효대사입니다. 조용한 절간에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세우시고 세상 속에 있는 복잡한 교회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시끌벅적한 교회에 목사로 오랫동안 있다 보니 때로는 저도 베드로처럼 조용한 산속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백성들을 돌보고 구원할 사명이 있기에 다시 시끄러운 마을로 내려가신 것처럼 저도 아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봐야 할 사명이 있기에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 머물면서 그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언한 대로 말세에는 인간성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것이 솔직히 만만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피곤하고, 마음이 상하고,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그 사정을 아뢰고 스트레스를 푸는데, 교회에서 당하는 문제와 스트레스는 어디 가서 풀어야 합니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세상 친구들을 다시 만나 술을 먹으면서 풀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얼마 전 저에게 한국에서 카톡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저랑 같이 군부대에 있을 때 지냈던 ROTC 동기 회장입니다. 저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제 설교 동영상을 보고 연락이 온 겁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 후 37년 간 못보고 못 만난 군대 동기를 카톡으로나마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군부대 있을 당시 ROTC 동기들 대부분이 같이 술 먹고 세상적으로 놀던 친구들입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 저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자연히 그들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오랫동안 목사로 지냈습니다. 그들과 사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시 그들을 만나서 반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다시 술을 먹을 수도 없고, 그들과 세상적으로 대화하기가 서로 불편합니다. 더구나 여기는 캐나다 땅이고, 거기는 한국 땅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한국에 가서 동기 모임을 할 수도 없습니다. 또 요즘은 COVID-19으로 인해 한국 가기가 참 힘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세상에 살지만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사는 방식과 대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는 목적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전도하는 사명이 있어 하나님이 우리를 그들에게로 다시 인도하면 우리는 그들과 어울리며 기회를 만들어야겠지요. 암튼 세상대신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우리들의 주된 활동영역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서조차 지내기가 힘들어지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욱 고립되고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일단 크리스천이 되면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잘 지내야 합니다. 교회가 가장 행복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에서 불완전한 사람만 보면 안 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재미있고, 봉사가 행복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돌보는 것도 보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 위로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영광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서 백성들을 돌보는 중에 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고, 그들로부터 싫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러한 사람들만 바라보았다면 예수님은 억울하고 분해서 만날 이를 갈고 “이 죽일 놈들!” 하고 원한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을 되새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시고 잘 인내하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혹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돌보라는 사명도 부여받았습니다. 혹은 일터나 학교에서 그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나보다 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을 돌보라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와 교회는 아직 세상에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어도 우리들의 바라봄은 타락한 세상과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을 돌보는 중에 하나님이 계속 위로를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보람과 축복과 행복도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사명이 있는 한, 그리고 사명이 아직 다 끝마치지 않은 한 우리들은 계속 죽지 말고 살아야 하고,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고, 죽을 고비에서도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사명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도 내일도 계속 주님과 동행하며 사명을 잘 감당하고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