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요즘 COVID-19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어 몇 달째 계속 뉴스가 나오다보니까 사람들이 점차 그 뉴스에 무뎌지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매일매일 확진자나 사망자 소식을 확인했는데 이제는 매일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뉴스를 보면 “아하- 또 사람들이 많이 죽었구나!” 하고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저의 주위에 확진자나 사망자가 생기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교회 성도님들이나 혹은 한인들에게 확진자가 생겼다는 소식이 없다보니까 “COVID-19이란 전염병이 우리하고는 그리 상관이 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실지는 안 그런데 말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까 미국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이 COVID-19 전염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충 숫자를 보니까 흑인계, 히스패닉계, 백인들보다 아시아계 사람들이 10분의 1수준으로 확진자 수가 적습니다. 아마 아시아계 사람들은 전염병 진원지가 중국이고 그 옆 나라다 보니까 미리부터 전염병 소식을 접하고 그 예방법들을 미리 터득하고 실천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특히 서양문화는 마스크를 잘 쓰지 않고 동양문화는 마스크를 잘 쓰는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몇 주 전 몇 분의 성도님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앨버타 주도 교회 예배 인원을 15명 이내에서 다시 50명 이내로 늘였다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확진자가 많은 캘거리와 부룩스(Brooks) 도시는 예외입니다. 그리고 실내는 여전히 15명 이내이고 야외는 50명 이내로 늘었는데, 그것도 2m 거리 제한이 있고 야외예배를 드리기에는 제약이 많습니다. 아직까지는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되겠습니다.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COVID-19으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감염이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뎌졌어요. 퀘벡 주나 온타리오 주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우리가 보기에 너무 염려스러운데 그곳에서는 도리어 서서히 가게들이 오픈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계속 가게가 클로즈 하면 경제 사정이 나빠질 것은 이해가 되지만 사람들의 망각과 무딘 마음도 한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달째 계속해서 뉴스에서 사망자 소식을 접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죽는 것에 대하여 점차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COVID-19 전염병이 우리들의 삶과 생각까지 서서히 바꾸는 것 같습니다.
COVID-19 전에는 사람들이 죽음에 관하여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혹 죽음에 관하여 말하면 재수 없다고 하고, 한국 사람들은 숫자 중에 4는 한자어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고 엘리베이터에도 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그 죽음이 나와도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산책하면서 기도하는 장소 중 하나가 집과 가까운 에덴공원 묘지입니다. 거기서 먼저 천국에 간 우리 교회 성도님들 묘비도 돌아봅니다. 그리고 여러 무덤의 묘비명을 보면서 이 분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를 자세히 살핍니다. 100세 이상 사신 분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들의 인생이 강건하면 70-80이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습니다. 70세를 살지 못하고 죽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묘비명에 보면 가족들의 추모의 글이나 성구가 적혀있습니다. 많이 적힌 성구 중의 하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어느 공원묘지에는 이런 글도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공원묘지를 돌면서 무덤 앞에 세운 비석들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묘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세 줄의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첫 번째 줄입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그 글을 읽고 그 사람이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무슨 이런 묘비가 다 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줄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고 그 사람이 마음이 순간 찔리면서 “아하- 이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여러분, 성경은 너도 나도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합니다. 사는 동안 죽음을 늦춰보려고 애써보지만 결국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진리가 있지만 그 중에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죽음을 애써 말하지 않고, 죽음을 잊고 살아도 죽음은 결국 다가옵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COVID-19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죽음에 대하여 무뎌져도 죽음은 결국 나에게도, 나의 가족에게도 다가옵니다.
고로 성경은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전도서 7:2 말씀입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7:4)
한국의 옛 민요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제가 이제 60세가 지나 서서히 늙어지다 보니 이 노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늙으니까 몸이 고장이 잘납니다. 그러다보니 어디 멀리 여행가기가 겁납니다. 그래서 깨닫습니다. “아하- 이래서 늙어지면 못 논다는 것이구나!”
그런데 한편 늙어지면 놀지도 못하지만 체력이 달리고, 기억력이 달려서 일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65-70세 정도가 되면 은퇴를 합니다. 고로 늙기 전에, 젊었을 때 일할 것을 미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끔 어리석은 학생들을 보면 공부는 나중에, 숙제는 나중에 하고 놀기만 먼저 하다가 나중에 에너지가 달리고 시간이 부족해 숙제를 못해가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방학 때 신나게 놀다가 개학 하루 이틀 남겨두고 밀린 숙제를 하느라고 엄마 아빠 누나까지 동원해서 고생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학생은 방학 때에 다음 학기에 배울 것까지 미리 준비해둡니다. 그러니 개학 때가 되면 여유 만만합니다.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는 동안 저 죽음의 세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언제 가더라도 하나님 앞에, 가족들에게, 모두에게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만 생각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잘 죽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저 세상을 준비합니다.
물론 죽음의 이야기를 하면 당장은 당황스럽고 힘드신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은 한국에서 사시고 한국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병든 부모님이 한국에 계신데 가보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당시 철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그대로 차타고 달려갈 텐데...“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님이 병들어 죽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희 부모님을 살려주세요, 고쳐주세요.” 이때 하나님이 부모님을 살려주시지 않고 죽게 했다고 그만 시험에 들어 교회에 안 나오는 자녀들도 꽤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그렇게 살려달라고 기도해도 천국에 가시는 것만 계속 꿈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살려달라는 기도를 포기하고 장례를 준비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좀 섭섭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없으니까 마음이 허전하고 이상합니다.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깨닫게 됩니다. “아하- 잘 돌아가셨구나! 하나님, 잘 부르셨어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시 만날 텐데요.”
여러분, 불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냥 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실컷 쾌락을 얻어 보려고 애쓰다가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2차 죽음,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의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을 때 2차 죽음의 문제를 풀고 갑니다.
고로 1차 죽음이 마치는 날 우리는 2차 죽음을 해결하였기에 천국과 영생을 얻고 부활을 기대합니다. 이미 천국을 맛본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사는 것보다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땅에서 살면서 마쳐야 할 사명을 다 마치기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애쓰고 힘쓰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때 두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세상의 사람들은 둘로 나뉩니다.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살았을 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심판을 당하고 영원히 죽느냐 아니면 영생을 얻고 찬란한 부활의 모습으로 다시 사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산 자는 죽은 자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산 자는 죽은 자의 묘비 앞에 섭니다. 그 묘비는 말합니다. “너도 준비를 하라.” 그렇습니다. 언젠가 내 묘비 앞에도 또 다른 산 자가 서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먼저 죽은 자가 실패한 것도 아니요,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산 자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음을 잘 준비하여 주님 안에서 죽은 자는 영생을 얻고 부활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쪼록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 영원히 산 자가 되어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영원한 행복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