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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상황윤리’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 이 말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자주 사용하므로 정통 신학을 한 분들에게는 좋지 않은 말로 여겨집니다. ‘상황윤리’의 반대 개념은 ‘절대윤리’입니다. 1966년 조셉 플레처란 미국인 교수가 ‘상황윤리(Situation Ethnic)’라는 책을 저술하므로 이 말이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상황윤리란 주로 성에 관한 윤리적 관점에 쓰였습니다. 즉 성에 대한 순결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랑하면 혼전 성경험, 동거도 가능하다. 이혼도 상황에 따라서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혼전 성경험이나 이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모세는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하도 이혼이 성행하니까 모세가 여성의 인권을 위하여 반드시 이혼증명서를 주고 이혼을 하라고 허락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혼당한 여성은 ‘이혼증명서’라도 없으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아주 매장이 되어 인권이 유린되고 결국 창녀가 되는 경우가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즉 모세는 그 당시 남성들이 하도 아내를 버리니까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할 수 없이 이혼증명서를 주어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마지못해 이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일종의 상황윤리입니다. 절대윤리로서는 이혼은 안 됩니다.
예수님도 배우자의 음행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자기도 그런 상황이라고 혼전동거하고 이혼하므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더구나 요즘은 남편이 돈을 못 벌어오면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이뿐 아니라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든 이혼합니다. 상황윤리의 폐허입니다.
거짓말의 경우를 봅시다. 거짓말은 절대윤리의 관점에서는 금지됩니다. 그러나 상황윤리가 적용이 되면 허락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기생 라합의 거짓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적인 여리고 성에서 창녀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스파이 두 명이 적군에게 도망 다니다가 자기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고 그들을 숨기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쫓는 군인들에게 “스파이가 딴 데로 도망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그녀의 거짓말을 믿음의 행위로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그녀의 거짓말이 탄로 나면 그녀는 죽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주려고 목숨 걸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살 수가 있었고, 결국에는 이스라엘 스파이 중의 한 사람인 살몬과 결혼을 하여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6.25 때에 공산당이 교회로 쳐들어왔습니다. 그곳의 사찰 집사님에게 “너희 목사 어디 있어?” 하며 윽박지릅니다. 이때 사찰 집사님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 말씀만 생각하여 “예, 우리 목사님 저기 교육관 뒷방에 숨어있어요.”라고 말했다면, 그래서 목사님이 공산당에게 죽었다면 그 사찰 집사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직한 사람입니까? 미련한 사람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의인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은 정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는 도리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요, 살인 방조죄가 되고 맙니다. 즉 정직이란 단지 사실과 거짓에 입각한 단어가 아니라 때로는 불의와 불법에 따라서 판단이 좌우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더 큰 의를 위해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도리어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어떤 교회의 목사님의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예뻐요?” 그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렇게 묻지 마! 나 거짓말 못해!”
여러분, ‘하얀 거짓말’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저는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얀 거짓말’을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본의 아니게 빨간 거짓말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빨간 거짓말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하얀 거짓말도 자꾸 하면 자신의 인격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고로 “이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암투병 중인 어떤 늙으신 선배 목사님과 젊은 후배 목사님의 대화 내용입니다. 젊은 목사님이 선배 목사님에게 인사합니다. “아- 목사님, 요즘 혈색이 참 좋습니다. 좀 차도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선배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아- 후배 목사님이 기도를 많이 해주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자 후배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어- 저는 기도를 안했는데요.” 절대윤리에 투철하여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젊은 목사님의 대답으로 서로가 뻘줌해지고 말았습니다.
살인의 경우도 생각해봅시다. 절대윤리로는 살인은 금지됩니다. 그러나 정당방위라는 상황이 성립 시에는 살인도 허락이 됩니다. 전쟁터에서는 적군을 많이 죽이면 도리어 영웅이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총독을 살해했습니다. 일본의 상황에서는 살인죄입니다.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에서는 영웅이요, 독립투사입니다.
전쟁의 경우도 어떤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켰느냐에 따라 전범이 될 수가 있고, 정의로운 전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전쟁이 좋으냐? 평화가 좋으냐?”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북한을 옹호하는 김일성 주체사상파(주사파)나 종북주의자들은 북한이 미국의 폭격을 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들도 같이 파괴를 당하는 입장입니다. 고로 그들은 전쟁 절대 반대입니다.
사실 “전쟁이 좋으냐? 평화가 좋으냐?”라는 질문에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가 좋다고 합니다. 절대윤리적 관점에서는 당연히 평화가 좋습니다. 이와 똑같은 식의 질문입니다. “정직이 좋으냐? 거짓이 좋으냐? ”사랑이 좋으냐? 미움이 좋으냐? 당연히 거짓보다는 정직이 좋고, 미움보다는 사랑이 좋습니다. 그러나 상황윤리적 관점에서 세밀하게 나눠보면 이에 대한 대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이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전도서 3장에는 천하에 범사에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전도서 3:8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만약 전쟁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더 큰 살육이 일어나고 인권과 자유가 말살이 되는 경우에 처할 때는 용감하게 전쟁을 해야 합니다. 현재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은 적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하면 핵무기 시설을 미리 폭격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민족과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생존원리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의 주제인 상황윤리라는 면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전쟁이 좋으냐? 평화가 좋으냐?”라는 주사파 진영의 질문에는 이렇게 역으로 질문하면 됩니다. “북한처럼 공산국가가 되는 게 좋으냐? 자유 대한민국이 좋으냐?” “사생활의 자유가 통제되며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느냐? 자유가 있고 인권이 있는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느냐?“ ”북한에서 살기를 원하느냐? 대한민국에서 살기를 원하느냐?“
때로는 북한 체제가 좋다고 옹호하는 분들도 보면 그곳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크리스천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두 마음을 품고 말과 행동이 의도적으로 모순된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민족끼리’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아니 그렇게 같은 민족을 사랑하면 왜 북한에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십만 자기 동족을 가두고 인권을 유린합니까? 그리고 김일성 일가 독재자는 각종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자기 동족은 왜 3백만 명이나 굶어서 죽게 합니까? 그런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같은 민족끼리’라고 평화를 외친들 그것이 과연 진실된 것입니까?
거기다가 툭하면 서울 불바다 이야기를 하고,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지난 25년간 8번이나 약속을 하면서 계속해서 거짓말로 속이고 마침내는 핵무기 완성했으니 이제는 핵실험 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같은 민족끼리 평화하자’라고 말하면 그게 과연 진실된 것입니까?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도 보면 공산주의자는 공산화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신들의 좋지 못한 목적을 위해 상황이 여유치 않으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하고 살인도 합니다. 고모부도 고사포로 죽이고, 형도 독가스로 죽입니다. 그들은 나쁜 목적을 위해 상황윤리를 역이용하고 타당화합니다. 고로 그들에게 상황윤리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상황윤리란 하나님의 공의와 선을 이루기 위해 작동을 시켜야지, 나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황윤리를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상황윤리를 배우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윤리를 먼저 터득해야 합니다. 그런 절대윤리의 바탕에서 상황윤리를 적용시켜야지, 절대윤리는 싹 무시된 채 상황윤리만 자기 멋대로 적용시키면 이 세계도 파괴되고 우리의 신앙도 파괴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절대윤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시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의 절대윤리가 상황에 따라서 변질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몇 년 전에 한국 부산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회의가 열렸습니다. 거기에 다른 종교 지도자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화합하기 위해 예수님 말고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명 ‘종교 다원론’입니다.
어찌 보면 그런 특수 상황에서 아주 지혜롭게 대처하는 신사적인 말과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설령 죽음이 나에게 다가와도 그런 잘못된 상황윤리에 빠져 예수님 외에 다른 종교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 그는 뭘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윤리, 절대 진리를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신20: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 윤리, 절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황윤리도 있고 상황 진리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방법이 나옵니다. 고로 이를 성경대로 잘 적용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반면 이를 잘못 적용하면 지멋대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무쪼록 성경 많이 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시어 좋은 크리스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