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힘을 얻으리니

날짜: 
2022/01/02
말씀: 
사40:27-31
말씀구절: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설교: 

새해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을 하려고 하는데 영 힘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혹은 이제까지 인생을 살면서 쌓여진 피로감이 아직도 계속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좀 쉬고 싶은데, 환경이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계속 쌓여가고, ‘만성 피로 증후군’이 생길 수 있고, 우울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인생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2년 간 계속된 COVID-19 사태로 인해 돌파구를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곳 외국 땅에서 사는 우리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새해가 다가왔어도 “아- 피곤해!” 하고 축- 쳐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을 제법 살아본 솔로몬 왕도 노년에 고백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전1:8) 오늘의 본문도 말씀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사40:30) 사실 소년의 경우에는 피곤함을 잘 모르는 시절입니다.

저의 소년 시절을 돌이켜 봐도 그때에는 피곤을 잘 몰랐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계속 새 힘이 났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종종 부모님이나 노인 분들이 피곤하다고 하면 “피곤이 뭐지?”라고 할 정도로 그때에는 피곤이란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다고 합니다. 오늘 소년들에게 혹은 학생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요즘 니들도 피곤하니?” 아마 이런 질문을 한국에서 하면 좀 이상할 겁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입시 위주의 공부를 경쟁적으로 하다 보니 늘 피곤합니다. 어른보다 학생들이 더 피곤한 곳이 한국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학창 시절 꿈이 생각납니다. 다름 아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뭐긴 뭐에요? 공부하기가 싫어서이지요. 물론 다른 학생들에 비해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또 잘 하지도 못했는데, 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피곤한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공부 열심히 하고, 또 잘하는 학생은 도리어 공부에 대한 피곤함이 덜 할 겁니다.

그러나 역시 그들 학생들이나 젊은이에게도 인생은 좀 피곤합니다. 그러면 저의 꿈대로 어른이 되어서 모든 학교 과정을 다 졸업하고, 공부에서 해방이 되면 어떻습니까? 인생의 피곤함에서 해방이 되는 겁니까? No! 도리어 그때부터 인생의 본격적인 피곤함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우리들은 자주 말합니다. “아- 피곤하다!”

제가 한국에서 전도사 시절에 미아리와 삼양동 지역을 열심히 심방 다녔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달동네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직 미혼이고 나이도 30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에 차도 없었기에 걸어서 그 높고 낮은 지역을 대여섯 시간씩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심방을 가신 분들은 대개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심방을 마치면 늘 저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피곤하시지요?” 저는 전혀 피곤하지 않은데 권사님들이 스스로 피곤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영지버섯 음료수를 건네줍니다. 이것 마시고 힘을 내라는 겁니다. 그 당시 하도 영지버섯 음료수를 많이 먹어서 지금도 영지버섯 음료수를 보면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아니 이런 영지버섯 음료수 왜 마시지? 피곤하지도 않은데?”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설교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피곤함에 대하여 말하는데, 본인은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거뜬합니다. 할렐루야! 계속 그렇게 건강하시고 힘차게 새해를 달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제법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이 쌓여서 무기력하게 인생을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새해가 되도 별 희망이 없습니다. 더구나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이런 저런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 그 피곤함은 더해지게 됩니다.

특히 말세에는 인간성의 타락이 극도로 심해져서 사람 때문에 피곤해질 때가 참 많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 안 보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지구를 떠나든지, 내가 지구를 떠나든지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그 사람으로부터 다가오는 피곤함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얄궂은 운명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난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인이 그랬습니다. 남편을 다섯 명을 만났습니다. 다시 말해 이혼을 다섯 번 했습니다. 이혼을 한 번만 한 것도 큰 상처인데, 다섯 번을 이혼했으니 얼마나 인생이 힘들고 피곤하겠습니까? 지금은 결혼하지도 않고, 또 다른 남자와 동거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도 역시 자기를 피곤하게 합니다.

그래서 늦게까지 잠을 자고, 정오나 되어서 힘없이 터덜터덜 우물가로 왔습니다. 누가 봐도 이 여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부부들이 이렇습니다. 그 여자를 만나서 살면, 그 남자를 만나서 살면, 인생이 행복하고 살맛이 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인생이 꼬이고, 피곤이 더해지는 겁니다.

더구나 사회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를 피곤하게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들도 갈수록 자기를 피곤하게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경도 자기를 도와주지 못하고, 도리어 더욱 안 좋은 모습으로 변해만갑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아- 누가 나의 이런 사정과 형편을 알아주나? 누가 나의 이 원통함을 알아주나?” 야곱은 살면서 원통한 일을 몇 번 당했습니다. 자기는 사랑하는 라헬을 배우자로 얻기 위해 7년간 힘든 노동을 했지만 첫날밤에 그 꿈이 산산이 깨졌습니다.

첫날밤 캄캄할 때에 신방에 들어온 여성은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여자였습니다. 아- 이거 완전 사기 결혼을 당한 겁니다. 그것도 외삼촌한테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합니까 이미 엎지르진 물입니다. 그녀를 평생토록 책임지고 가야만 합니다. 누가 이런 야곱의 사정을 알아주고, 그 원통함을 풀어주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결혼한 야곱은 처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고 또 다시 7년간 외삼촌 밑에서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은 월급을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믿었던 외삼촌에게 노동 작취를 당한 겁니다. 그렇다고 외삼촌에게 따질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아- 야곱의 인생은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겁니까? 아- 이제는 지칩니다. 피곤합니다.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와서 낮선 외국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해 두 해도 아니고 장장 칠십년의 포로생활입니다. 그 동안 외국 땅에서 쌓여진 원한이 너무 많습니다. 고향이 그립고, 슬프고 비참한데, 권세를 가진 바벨론 사람들이 너희들 고향에서 부르는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재촉합니다. 아- 증말! 엉엉 통곡하고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 즉 하나님이 너의 그러한 사정과 형편을 다 보시고 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너의 원통함을 풀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피곤함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아- 주님, 저도 일어나고 싶어요. 새해가 되었으니 당연히 일어나야지요. 그러나 마음은 원하지만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의 사전에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 분이 6일간 천지와 만물들을 창조하고 난 후 7일째 쉬셨는데, 피곤해서 쉬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작품을 다 만들고 난 후 작품 감상을 하시느라 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7일째를 따로 정하시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만든 사람과 더불어 같이 즐겁게 노래하고 찬양을 하자는 것입니다. 같이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행복해야 할 백성들이 지치고 피곤하여 축- 쳐져 있으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쳐도 독수리가 하늘로 솟아오르듯이 우리도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31)

우리는 요즘 거의 모두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최신 스마트 폰이라도 일단 배터리가 다 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배터리 충전을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나를 주님과 연결시켜서 주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힘이 떨어졌을 때, 피곤해졌을 때,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을 때, 주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그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도 힘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일할 기력이 없으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그 사역이 힘들어서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의 그 위대한 사도 바울 역시 주의 일을 하다가 힘이 떨어졌습니다. 때로는 살 소망까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므로 주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전에도 나에게 힘을 공급해주신 주님이 또 다시 새해를 살 수 있도록 그때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고로 계속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일어나십시오.

주님과 더불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 주님은 이제까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실망이 찾아온 것은 내 자신이 부족하여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주님의 힘이 아닌 내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피곤함은 내 탓도 너의 탓도 아닐 수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안 남은 줄 알고 우리를 이간하고 힘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들에게는 마귀를 물리칠 예수님의 이름과 그 분의 권세가 있습니다. 날마다 나를 낙심케 하고, 힘이 떨어지게 하는 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무쪼록 새해에도 계속 힘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