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날짜: 
2005/06/27
설교: 

요일2:15-17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어느 교회에서 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 목사님이 노인 분들을 다 모아놓으시고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물론 즐거운 때도 있었겠지만 힘들고 괴로울 때도 많으셨지요?"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또 물어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천국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고 영화로운 곳임을 믿으십니까?" 그러자 모두가 큰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서 마지막 질문을 또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천국에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오늘 밤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사람은 한 번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웃기만 할뿐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이 좋은 곳임을 인정하지만 당장 그곳으로 떠나라고 하니 선뜻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동족 유대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또한 사도 바울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와 같이 자신의 일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아마 그저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느라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서기가 주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라도 우리는 주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되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1.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즉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각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마음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빛과 어두움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오면 자동적으로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사라지면 어두움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니 어찌 한 마음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마6:24) 즉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등산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혼자서 깊은 산 속을 헤매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습니다. 그는 더듬더듬 거리면서 깊은 계곡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그는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는 여러 바퀴 굴러 떨어지다가 가까스로 나뭇가지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발로 더듬거려 보았습니다. 때마침 발꿈치에 작은 돌부리 하나가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발꿈치로는 작은 돌부리를 디디고, 두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쥐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에서 힘이 빠집니다. 불현듯 그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기도하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캄캄한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그때 메아리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손을 놓아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놓았다가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뼈도 추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손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도록 나뭇가지를 놓치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좌우를 분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밑을 내려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바로 한 치 밑이 평지였던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두 손을 놓고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목 놓아 한참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발을 쭉 뻗고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어두워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 쥐어야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세상 줄을 쥐고서 살아갑니다. 돈줄을 쥐기도 하고, 권세의 줄을 쥐기도 하고, 또 지식의 줄을 쥐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 줄을 잡으면 참 평안이 없습니다. 등산 갔던 사람처럼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헛수고만 할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세상 줄을 놓을 때, 자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세상 줄을 놓아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2.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 요한은 죄악의 뿌리를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다시 말해 동물적인 욕구요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면 인간 사회는 동물의 왕국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죄악이 만영한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동물적인 욕구라면 안목의 정욕은 보다 인간적인 욕구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보기 좋은 것들을 다 취하려고 하면 역시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사치에 빠질 수 있고, 허영에 물들 수 있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얻으려고 여러 가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내세우며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심해지면 착각에 빠지므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만족감에 빠지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심해지면 자신이 하나님처럼 잘났다고 하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이러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5:16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즉 타락한 육신을 좇아 행하지 말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주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43-45에 빈집의 우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즉 귀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빈 집에 들어가서 그 형편을 더욱 나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의 집을 성령 충만으로 채우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가지고 귀신들이 들어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난리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침부터 교회 일 하느라 때로는 밤늦게 집에 들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남편 분이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집사님을 책망했습니다.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거요? 집에 좀 붙어있어요! 교회가 밥 먹여주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럼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여고동창생들 만나서 고스톱이나 치고 댄스홀이나 다니면서 춤이라도 춰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그 말을 듣더니 남편 되시는 분이 두 손을 번쩍 들며 "알겠소. 교회일 열심히 하구려."라고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가기 쉽습니다. 더욱이 외국 땅에서는 누가 보는 눈이 없고, 간섭하는 손길이 없기에 죄악에 빠지기 더욱 쉽습니다. 고로 외국 땅에서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므로 죄악도 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서야합니다.
3.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러분, 이 세상의 것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구름이 흘러가듯이,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가듯이 잠시잠깐이면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잠시 있을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쥐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우연히 구멍을 뚫고 들어간 곳이 치즈창고였습니다. 치즈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못 먹을 치즈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생쥐들은 행복했습니다. 매일 들락날락하면서 치즈를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구멍을 뚫고 치즈창고에 들어갔는데 치즈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생쥐들은 발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치즈를 옮겨갔어?"
여러분,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것이 본래 자기들의 치즈였습니까? 자기들이 남의 것을 훔쳐 먹어 놓고, 누가 자기들의 치즈를 가져갔느냐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 동안에 내가 임시로 맡아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다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날 때 손을 꽉 쥐고 태어난다. 그들은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를 움켜쥘 것처럼 손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는 손을 쥐고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빈손으로 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여러분, 어차피 놓고 가야할 일시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면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해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것, 신령한 것, 위엣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참다운 인간이요, 참다운 크리스천입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고로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그곳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대 소원이요, 최대 희망입니다. 이 찬란한 희망 속에 오늘도 이 외국 땅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