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8:6-9 실족 하지 말자
발을 헛디디는 것을 실족이라고 합니다. 대개 발을 헛디디면 발이 삐거나 타박상을 입거나 심하면 부러지기도 합니다. 더 심하면 뇌진탕으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실족을 당하기도 하고 남을 실족시키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 형편을 아셨는지 예수님도 오늘 본문 7절 중간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혹시 살면서 가장 크게 실족을 당한 경험이 어느 때였습니까? 그리고 누가 어느 내용으로 여러분을 실족케 했습니까? 아마 자기를 그렇게 실족시킨 사람을 미워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실족시킨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래, 그 사람을 용서하면서 살자!"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안돼, 그 나쁜 놈!" 하고 아직도 이를 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내 자신도 남을 실족케 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부분 잘 기억을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남을 실족시키지 않은 것 같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남을 실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십시오. "나는 남을 실족 시킨 일이 더 많은가? 남에게 실족 받은 일이 더 많은가?" 대답은 어떻게 나올까요? 첫째, 실족 받은 일이 더 많다. 둘째 실족 시킨 일이 더 많다. 셋째, 비슷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상처를 주고 실족시키는 일은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생각해보세요. 길거리에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한테 상처받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실족시킬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친절을 베풀고 정성을 쏟은 사람들일수록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하는 일이 크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와 성도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실 성도와 목사가 얼마나 가깝습니까? 목사에게 있어서 성도란 목회를 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성도에게 목사란 미우나 고우나 생의 일부를 맡긴 자기의 지도자입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설교를 들어야 하고, 정상적인 성도라면 일주일에 한번 주일에는 꼭 그 얼굴을 보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목사에게 상처를 입으면 그 아픔이 크고 꽤 오래 갈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깝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게 되고, 가깝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다 보면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실족을 당하지도 않고 주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간단합니다. 죽으면 됩니다. 공동묘지의 죽은 사람에게 아무리 욕을 해도 그는 전혀 실족하지 않습니다. 기분나빠하지도 않습니다.
반면 죽은 사람은 남을 실족시킬 힘이 없습니다. 남을 때리거나 할퀼 힘도 없습니다. 내가 욕을 들었다고 기분이 나빠서 무덤에서 일어나 "야, 이 xx야!" 하고 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진리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혹시 남에게 상처받고 실족 당하므로 인해 기분이 나쁜 분이 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신 사도 바울을 생각하면서 "그래, 나도 죽으면 될 것을..." 하고 생각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 앞으로 나아오려고 하니까 제자들이 그 어린 아이들을 막고 꾸짖었습니다. "아니, 애들을 이곳에 왜 데리고 오는 거야? 애들은 가라." 그러자 예수님이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물론 여기서 '소자'라고 하면 뜻 그대로 어린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교회로 말하면 초신자, 또는 믿음이 아직 연약한 자를 통틀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확대하면 우리들 모두라고 해도 과장된 해석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무시무시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 목에다 연자 맷돌을 매게 한 후에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맷돌 아시지요? 그냥 맷돌도 사람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리면 죽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연자 맷돌이라고 하셨습니다. 연자 맷돌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정용 맷돌이 아니라 공장용 맷돌입니다. 가정용 맷돌은 사람이 손으로 돌려도 돌아가지만 연자 맷돌은 소에다 멍에를 지우고 돌리는 엄청나게 큰 맷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런 듣기에 상당히 거북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파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아신 겁니다. 그래서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에 한 남자 아이가 주일학교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집이 가난했는지 교회 나올 때 거의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옷도 빨지를 않아서 그 아이에게서 더러운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 다음 주일에 교회에 올 때는 옷을 좀 빨아 입고 오너라." 물론 그 선생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셨겠지요. 그런데 그 말에 실족을 한 어린이는 그 후로 다시는 교회 땅을 밟지 않았답니다. 그 어린이가 누구냐?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얘기를 언제 했냐 하면, 조찬 기도회 때 목사님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이하더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유의 깊게 보면 아주 흥미 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6~7절과 8~9절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앞의 부분에 나오는 '실족'이란 말씀의 희랍어 원어를 보니까 '스캔달리조'란 말을 썼습니다. 이 '스캔달리조'란 말은 영어 '스캔들(Scandle)'의 어원이 된 말입니다.
스캔들이 뭡니까? 이 말은 흔히 유명인사가 어떤 불륜의 관계를 저질렀을 때 주로 쓰고 있지만 사실은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전 방위적으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남을 넘어지게 하고 걸림돌이 되게 하는 종류는 모두 '스캔달리조'입니다. 그런데 8절 9절 말씀은 남을 실족케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실족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성경엔 '범죄하거든'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여기에 쓰인 원어도 똑같이 '스캔달리조'였습니다. 즉 상처를 줄 때나 상처를 받을 때나 똑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상처를 주는 사람도 문제지만 상처를 받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비난의 말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크게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상처준 사람하고 일 년간 말을 안하고 지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런 비난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더 나아가 "내가 아직 부족해서 하나님이 나를 깨우치려고 그런 모양이다. 내가 더 겸손해져야지." 하고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기 전에는 웬만한 일에는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되는 당일에도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왕이 되는 기름을 부으려고 보니까 없는 거예요. 어디에 있었지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행구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울이 왕으로 지명되니까 어떤 사람들은 "뭐 저런 사람이 우리 왕이 될 수 있느냐?" 하면서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그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보복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불렀던, "사울은 천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네!"라는 노래를 듣고는 당장 실족했습니다. 경우를 따지고 보면 앞의 경우가 더 심한 모멸감을 주는 것 같은데, 그때는 오히려 잘 참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자기 부하가 잘되었습니다. 상처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기서 실족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즉 실족하는 것은 남에게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도 7절에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족을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아무튼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여러분, 실족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족하지도 마세요. 웬만한 일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그저 웬만하면 허허 웃어넘기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실족케 하지도, 실족하지도 않도록 여러분 마음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족을 피할 수 있을까요?
1. 실족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겁니다.
실족하려면 아주 하찮은 이유 때문에도 실족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위험성을 늘 생각해서 우선 남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 한 마디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친한 친구끼리, 또는 가까운 사람끼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아울러 자기보다 아래인 사람에겐 더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들을 윽박지르고 소리치면 그 자녀의 기분이 어떠합니까? 상처받고 실족합니다. 부모는 교회에 잘 나오는데 자녀가 교회에 안나오는 경우 대부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실족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아무리 내 자녀라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주변에서 빙빙 돌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들이 떠납니다. 왜 그럴까요? 실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항상 이런 실족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주의를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민 목회를 하시고 개척 교회를 목사님들은 이런 부분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 자주 합니다. "주여, 제발 성도님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특히 목사인 저에게 시험 들지 않게 하옵소서."
2. 실족을 피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어린 아이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성가시기만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 하나라도 실족하길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강한 어조로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어쩌면 그 차이가 너무 심하여 "너와 나는 서로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서로 가까워지기에는 너무도 머나 먼 당신으로 생각하고 만나자마자 속히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혼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성격 차이'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보면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너와 내가 다르다고 서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결국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상대방을 우습게 여기는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즉 실족케 되는 일은 관계의 정립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실족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잘 정립되어져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한 몸이요, 너와 내가 지체라고 하는 관계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옆에 있는 그를 미워하는 것은 곧 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곧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그를 무시하는 것은 곧 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색깔이라고 빠지면 무지개 색이 아닙니다. 무지개가 서로 "나는 너 같은 색깔을 싫어해." 하면서 그를 빼버리면 그 무지개는 병신 무지개가 되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색이 다 모여서 예쁜 무지개가 되듯이 서로가 조화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교회가 부흥해서 큰 교회로 이사 가고, 사람들이 많아져서 더 많은 하나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먼저 우리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아름다운 관계로 엮어져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족을 시키지도 실족을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서로를 귀하게 여기므로 실족을 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실족을 피하기 위해서 결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결심과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실족시키지 않고 실족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단해야 합니다. 앞으로 실족하지 않겠다. 실족시키지도 않겠다고 또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말과 행동과 마음을 주체할 수 없기에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실족하지 않고, 실족시키지 않도록 내 말과 행동과 마음을 주장해 주세요." 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실족하지 말자. 실족시키지 말자"라는 소극적인 것을 뛰어 넘어 남을 격려하고, 남에게 용기주고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 영혼을 실족시킬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회복시키려고 애쓰며, 한 영혼을 세워주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보다 값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혹시 오늘 실족한 사람이 있습니까? 실족의 자리에서 계속 앉아 울지만 말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어 승리하시고, 여러분도 용기와 격려의 사람이 되어서 이곳에서도 하늘나라를 가꾸시는 보람과 행복을 누리시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실족하지 말자
날짜:
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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