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탄 포도주

날짜: 
2017/04/10
말씀: 
마27:33-37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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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부터 한 주간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일들을 기리면서 보내는 고난주간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고 싶어서 한 상상력이 풍부한 동화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고난 주간을 보내는 우리들에게도 귀한 의미가 담겨 있어서 소개를 하려고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로마 군병들의 진영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한 꼬마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꼬마를 가리켜서 점박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 유난히도 큰 점 하나가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꼬마 점박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얼굴의 점 때문에 "점박아- 점박아-"라고 놀리듯이 부르는 것이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하루는 꼬마 점박이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도 듣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도 낳게 하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게 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꼬마 점박이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내 얼굴에 나있는 점을 좀 빼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되겠다."
그런데 점박이는 워낙 심부름하는 일이 많아서 좀처럼 틈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마 점박이는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처형을 당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꼬마 점박이는 낙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내 얼굴에 있는 점도 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구나!"
그렇게 낙심해 있는 찰나에 로마의 백부장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불렀습니다. "점박아- 이 쓸개 탄 포도주를 가지고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거라. 그리고 거기에 가서 오늘 처형을 당하도록 되어있는 예수님에게 이것을 드리고, 네 얼굴에 있는 점도 빼달라고 부탁을 드리려무나."
꼬마 점박이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쓸개 탄 포도주를 들고서 얼른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고 한참 뒤에 꼬마 점박이가 다시금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까 아직도 그대로 점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백부장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점박아- 어떻게 네 얼굴에 점이 그대로 있느냐? 아니 예수님에게 점 좀 빼달라고 부탁을 하지 아니했느냐?"
그 말을 들은 꼬마 점박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제가 예수님께 드린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은 그저 입에 대는 시늉만 하시고는 마시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이마에는 가시가 찔리시고, 또 온몸이 채찍에 맞으셔서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차마 제 얼굴에 있는 점을 빼달라고 부탁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돌아왔어요."
여러분, 이 이야기를 만든 동화 작가는 꼬마 점박이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도 꼬마 점박이는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평생소원이었던 얼굴의 점을 빼달라는 부탁을 차마 하지 못하고서 그냥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야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든지 말든지 그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세상일에만 분주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통해서 내 육신의 욕구만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모습을 각자 생각해보고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도 기껏해야 꼬마 점박이가 자기 얼굴에 있는 점 하나만 빼달라고 부탁하려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면 크리스천으로서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돈은 돌고 돌다가 결국은 다른 사람의 손에 다 맡기고 떠나야 되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도의 수준에 우리의 소원이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좀더 궁금한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름 아닌 왜 우리 예수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받으실 때 입에만 대시고 마시지 않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고난 주일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므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맑은 정신으로 겪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피땀을 흘리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종들이 검과 망치를 들고서 예수님을 붙들러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시몬 베드로가 자기의 검을 빼들고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잘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검을 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어찌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즉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마취제로 사용되는 쓸개 탄 포도주의 도움을 입어서 육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실 생각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못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세미한 부분까지 맑은 정신으로 겪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 31:6~7절에 보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독주를 마시우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만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루살렘의 귀부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돈을 내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죄수들에게 쓸개 탄 포도주를 공급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도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죄수가 정신이 또렷한 채로 있는데 그의 맨 살에다가 굵은 못을 박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죄수가 그것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죽는다고 소리치면서 반항할 것입니다. 기를 쓰면서 몸부림칠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가 마취제인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서 정신이 몽롱해 지면, 굵은 못을 박더라도 반항하지 않으니까 쉬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도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죄수에게 쓸개 탄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일단 예루살렘의 귀부인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써 쓸개 탄 포도주를 입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못난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세미한 부분까지 맑은 정신으로 겪기 위함이셨습니다.
2.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실 일들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난 뒤에 어서 빨리 예수님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 주변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든 장본인들인 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야유를 퍼부으면서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그리스도이어든 어디 한 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또 그곳에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값싼 동정이나 보내면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는 저들을 위하여 쓸개 탄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시고, 맑은 정신으로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이 몽롱하였다면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없었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두 강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왼편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 강도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만일 예수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서 정신이 몽롱한 채 그저 십자가 위에서 고개만 푹- 수그리고 계셨더라면, 예수님은 회개한 오른편 강도를 구원하지 못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한 사람의 강도까지라도 구원하시기 위해서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물론 심히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맑은 정신을 유지하므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는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면서 섬기던 몇몇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 자기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마치 칼이 자기의 마음을 찌르는듯한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즉 당신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으니 그리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였지만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이 몽롱해졌다면 어머니도 못 알아보고 위로의 말씀도 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또한 거기에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당시 예수님에게는 네 명의 남동생들과 여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머니를 제대로 모실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불쌍한 사정을 아시고 자기 대신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고 다시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일들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재산이 있다면 그것도 정리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가족들 얼굴도 보고 유언도 남겨야 합니다. 그러나 미리부터 정신을 잃고 무의식으로 빠지게 되면 중요한 정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이 몽롱해졌다면 그러한 마지막 일들을 다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하여 쓸개 탄 포도주 마시기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육신적으로는 매우 큰 고통이요 고난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그 고난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하여 쓸개 탄 포도주를 거부하시고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때로는 쓸개 탄 포도주도 거부하면서까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후 4세기에 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이 이집트에 살았습니다. 그는 사막의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한 번은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서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안타까워서 예수님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묵묵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앞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카리우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저야 할 십자가는 저기 있느니라. 가서 너의 십자가부터 먼저 지고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 십자가를 주겠노라."
거기에 가니까 그가 져야 할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예수님의 어깨에 지어져 있던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 주여! 주님의 십자가를 누가 대신 졌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것이 곧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주는 것이란다."
여러분, 고난주간에 우리는 각자 지어야 할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때로는 몽롱한 정신이 아닌 맑은 정신으로 그 고통도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이 외국 땅에서 버티고 사는 것조차 우리에게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외국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또 다시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지기가 어쩌면 너무도 힘들고 무거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도망가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수고를 하는 것은 부모에게는 오히려 보람이 되고 힘이 되듯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 외국 땅에서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고난주간에 자기에게 맡겨준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며 끝가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