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으로 맞이하는 성탄절

날짜: 
2005/12/18
설교: 

마1:18-25 아픔으로 맞이하는 성탄절
오늘의 설교 본문 ‘아픔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은 무엇인가 매치가 안되는 것 같습니다.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라고 해야 하는데 거꾸로 ‘아픔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라니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은 죄와 사망에 갇힌 인생들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요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런데 그 같은 영광과 기쁨의 사건 이면에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며 그 기쁨 뒤에서 남몰래 가슴아파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마리아와 요셉의 아픔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마리아라는 처녀를 사용하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이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 예언이 있은 후 약 700년 후에 천사가 마리아라고 하는 한 처녀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2, 33)
그러자 마리아가 놀라서 대답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마리아는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자연 법칙상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요셉이라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같이 잠자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임신된다는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처녀가 혼전의 성적 타락이 발각되면 돌로 쳐서 죽게 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천사의 예언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겠습니까? 마치 마리아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처녀의 임신 사실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까지 큰 근심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아픔을 싫다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한편 이러한 아픔은 정혼한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다는 말은 도저히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믿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약혼녀인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할 때 얼마나 큰 배신감으로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고 잠 못 이루는 많은 밤을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고민하며 신중히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이 일을 내가 발설하면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이 일을 처리하자.” 성경은 이런 착한 마음을 가진 요셉을 가리켜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 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임신 사건은 결혼을 앞둔 총각 요셉과 처녀 마리아를 불행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이러한 아픔을 감당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에는 요셉과 마리아처럼 아픔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역사란 영웅호걸이나 이름이 있는 명망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요셉과 마리아처럼 스스로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이 움직여지고 결정되어 집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당시에 헤롯왕이나 아우구스트 황제 같은 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크게 알려진 사람들이요, 또 유대인 사회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랍비 등은 그 이름과 명성이 널리 알려진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때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나사렛이란 촌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알았을 뿐이고, 모두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 마리아나 요셉은 누가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즉 생명의 역사는 이름 없는 사람들, 그러나 아픔을 감수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져 나갑니다. 아우구스트 황제나 헤롯왕, 또 그 당시에 이름을 떨치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랍비들은 실상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을 훼방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고 말씀합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이라는 아픔을 감수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 교회를 위하여 때때로 아픔을 감수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픔을 통하여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면에는 독생자를 이 어두운 세상에 보내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 남몰래 아픔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우리가 보듯이 하나님의 일들은 아픔과 고난을 감수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 아픔을 지기 위해서는 당장 나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피하려고 도망치면 도리어 나에게 엄청난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덥석 안아 버리면 거기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마리아와 요셉이 그 아픔과 잔존심의 상처와 고통을 자신의 품에 품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물론 아픔을 내 품에 품기란 쉽지 않습니다. 때때로 그 아픔을 품느냐 거부하느냐를 놓고 심한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차라리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요셉아, 이제 곧 네 약혼자가 임신할 텐데 그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요셉은 덜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리아가 이미 임신을 하고 난 후에 요셉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계시가 오기 전까지 요셉이 얼마나 갈등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을 때에 갈등을 합니다. 더구나 그 일이 나에게 아픔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더욱 갈등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에도 미리 양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셨으면 아브라함은 갈등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등하는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아픔을 감수하고 나아갈 때 독자 이삭 대신 바칠 예비된 양을 쟌- 하고 나타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이 미리 이렇게 계시해 주시면 갈등하지 얼마나 쉽겠습니까? “애들아, 여리고 성을 두 번을 돌면 구름이 몰려오고, 다섯 번을 돌면 우르릉 꽝꽝 천둥번개가 난다.” 이런 계시가 오고 그 계시대로 이루어지면 여리고 성을 도는 것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갈등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신나게 여리고성을 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 번을 돌때까지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마음이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그 갈등을 이기고 마지막까지 그 아픔을 감당하면 쨘- 하고 이루어집니다. 신기하게 성취가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겪었던 그 갈등, 그 아픔이 큰 기쁨으로 바꾸어집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아픔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고 잘 참으면 그 갈등과 그 아픔이 반드시 기쁨으로 바꾸어집니다. 이러한 진리가 바로 성탄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픔을 감당하는 자에게 성탄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아픔을 품지 않으면 임마누엘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아픔을 품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 성탄절을 맞이하며 아픔까지도 품을 수 있는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희생하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성탄의 기쁨만 챙기고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분이십니까? 물론 우리는 성탄절 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외치고 노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쯤은 성탄의 기쁨을 이루기 위하여 그 큰 고통을 감수하고 아픔조차 품에 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를 목이 터지라고 부르던 황영조 선수의 기쁨과 감격 속에는 훈련의 쓰라렸던 고통,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차라리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어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쏟아 놓는 감격의 눈물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옥동자를 낳고 기뻐하는 시부모님이나 아버지의 행복감 뒤에는 해산의 고통으로 울어야 하는 어머니의 괴로워하는 울부짖음이 가려져 있음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모든 기쁨의 역사 뒤안길에는 그 누군가의 눈물과 땀, 그리고 희생이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그리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마리아와 요셉처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같이 아픔과 오해와 고통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 위에 그리고 저들과 함께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시어 위로와 기쁨이 넘치시는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