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러분께 질문해 보겠습니다. 자장면이 좋아요? 짬뽕이 좋아요? 양자택일해보십시오. 자장면이 좋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짬뽕이 좋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때 꼭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짬짜면이요.” 아니, 둘 중에 하나 양자택일하라고 했는데 왜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중국식당에 가면 짬짜면 시켜먹습니다. 어떤 때는 우동도 시켜 먹고, 유산슬 밥도 시켜 먹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선택이 달라집니다. 요즘은 COVID-19 때문에 중국식당을 안간지 꽤 오래 됐습니다. 저보고 가자고 하지 마십시오. 하여간 인생 살다 보면 꼭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경우가 생깁니다.
여기 캐나다 Fast Food 레스토랑 같은 데에 가면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Stay(Here) or to go?"라는 질문입니다. 이때 Stay 혹은 here를 하든지 To go를 하든지 신속히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머뭇머뭇 거리면 직원이 짜증을 냅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양자택일에 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베들레헴 땅에 사는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아내 나오미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외국 땅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제 상황이 안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만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외국 땅에서 힘겹게 살다가 아들이 장성하여 모압 여인들을 택하여 장가를 보냈습니다.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들이 또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게 웬 재난입니까? 옛말에 재난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진짜 환난이 겹쳐서 왔습니다.
그 결과 한 집안에 과부가 세 명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여성 인권이 형편없던 시기라 과부 세 명이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애들아,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지 말고 너희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할 수 있으면 재혼을 해라.”
자- 이때 며느리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소망 없고 가난한 시어머니를 따라서 외국으로 가느냐? 아니면 자기네 땅, 자기네 족속에게로 남아서 재혼을 하고 새 출발을 하느냐? 요즘 같으면 계산이 뻔합니다. 남편도 죽었고 자녀도 없는데 누가 가난하고 소망 없는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평생 살겠습니까?
이때는 뭐 양자택일이 너무도 쉽습니다. 오르바는 대답합니다. “그럼,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저는 이만- 흑흑흑!”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미를 떠납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애야, 네 동서 오르바가 자기 족속에게로 돌아가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이때 룻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어머니를 따라가겠어요. 어머니의 백성이 저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두 며느리 중 하나는 이쪽으로 하나는 저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 나오미를 떠난 며느리 오르바에 대하여는 성경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간 룻의 이야기가 계속 진행이 되면서 결국 룻이 베들레헴에서 좋은 신랑을 만나 재혼을 하여 예수님의 조상이요 다윗의 조상인 오벳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룻은 나오미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룻기서의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나오미를 떠나 자기 족속에게로 돌아간 오르바의 선택이 똑똑한 선택인 것 같았는데 도리어 룻의 선택이 더욱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늙어 죽을 때가 가까이 오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지나간 시절 하나님의 도움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여호와만 섬길 것인가? 이방 신을 섬길 것인가? 양자택일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일심으로 대답합니다. “우리도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나이다.” 아멘! 짝짝짝- 박수! 참 잘했어요. 그런데 좀 지나니까 마음이 변질됐어요. 슬슬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좇아갑니다. 결혼할 때 보면 신랑과 신부는 오직 앞에 있는 이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합니다.
근데 조금 지나면 어때요? “하나님, 이 사람이 저의 짝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마음이 변질이 됩니다. 왜 그래요? 자기가 이 사람하고 계속 살려면 상당히 손해 볼 것 같습니다.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결혼이란 원래 상당히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은 상당히 힘이 든다는 것을 좀 알고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와 희생이 이루어진 만큼 나중에 보람과 행복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생은 안하고 행복만 택하겠다고 하면 그건 도둑놈 심보입니다. 심지도 않고 거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요즘은 이런 도둑놈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한 여성이 나이가 제법 먹고 이제는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결혼 배우자를 소개해주는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상담원과 함께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려고 설문조사를 먼저 했습니다. 상담원이 묻습니다. “월급은 400만 원 정도 되세요? 직장은 평생직장이 아니지요?”
그러자 여성이 상담원의 말을 가로막고 대답합니다. “월급 400은 좀 작은 것 같아요. 그리고 직장도 평생직장이면 좋겠어요.” 그러자 상담원이 대답합니다. “아니, 지금 본인에 대하여 질문하는 거예요?” 즉 자신이 갖춘 것은 하나도 없는데 배우자 될 사람만 모두 다 갖춘 사람을 택하려고 하니 이게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근데 요즘 세상은 꼭 이렇게 로또 당첨된 것처럼 그런 배우자를 만난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만 나오니까, 앞으로 결혼할 사람들이 모두 로또 신랑(신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가난한 사람하고는 결혼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혼이신 처녀 총각 여러분들이여, 사랑이 우선입니까? 돈이 우선입니까? 양자택일해 보세요. 이때 꼭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돈도 많이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는 잘 생긴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아- 참! 오늘 설교 제목이 뭐에요? ‘양자택일’입니다. 뭐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택할 수 없다면 하나를 택하라는 겁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양자택일의 순간이 올 때 우리가 무엇을 택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는 쪽으로 택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재판을 받을 때 빌라도 총독이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바라바와 예수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때 군중들이 선동을 받아 일심으로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결국 그들은 구원자 예수님을 저버리고 강도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110만 명이 죽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나라를 잃고 1900년간 설움을 받으며 온 세계에 흩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때는 아주 중요한 양자택일의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하여 내가 열매를 먹고, 그 책임을 져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지요.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양자택일 중 가장 좋은 쪽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에는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없습니다. 100억을 얻은 것보다 더 좋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으니 이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자다가 깨어 일어나면 좋아서 소리치고 팔짝 뛸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양자택일의 순간이 올 때 내 뜻대로 택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택하시도록 결정권을 그 분께 양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있으면 예수님이 좋아하는 진리를 택하고, 정의와 불의가 있으면 예수님이 좋아하는 정의를 택하고, 선과 악이 있으면 예수님이 좋아하는 선을 택해야 합니다.
물론 말세에는 악이 판치고, 거짓과 불의가 대세인데, 그런 선택을 하면 당장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때로는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품을 좇아 올바르게 선택하면 그 나중과 미래는 주님이 보장하고 주님이 책임집니다.
히브리서 11:25-26에 보면 모세에 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삽니다. 고로 우리의 선택은 세상 사람들의 선택하고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양자택일의 순간에 늘 주님과 함께 택하시고, 장래의 영원한 행복이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