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저희 가정이 4년째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강아지 사진이나 동영상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아지의 모습들을 보면서 식구들이 같이 웃고 재미있어 합니다. 그 동안 강아지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확실히 강아지 때문에 이전보다 가족들이 많이 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강아지에 대한 사진과 동영상 중에 우리를 매우 슬프고 가슴 아프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주인이 강아지를 차에 태워 몇 시간 동안 멀리 갑니다. 그리고 그 동안 키웠던 강아지를 낮선 길에다가 버리고 도망가는 겁니다. 강아지는 자기가 주인에게 버림받았다는 것도 모르고 주인의 차를 막 좇아갑니다.
그리고 강아지는 더 이상 좇아갈 힘이 없어서 사라진 차와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길거리에 처량하게 웅크리고 앉아서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도 고파오고 슬슬 추위가 몰려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강아지,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강아지, 당장 뭘 해야 할지,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이런 유기견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심히 안 좋아집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속으로 외칩니다. “아니, 강아지를 애초에 키우지 말던지, 이렇게 강아지를 버리면 어떻게 하는 거야?”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혹시 누구로부터 이 강아지처럼 버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시편 27:10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여러분, 부모는 웬만해서는 자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같이 아주 극한 상황이 올 때 때때로 부모가 자녀를 버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버림당한 강아지를 돌보는 유기견 보호소가 있는 것처럼 부모로부터 버림당한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림당한 강아지나 버림당한 아이들의 공통점은 참으로 불쌍하고 처량하다는 겁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이 우울해지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게 되고, 또 다시 버림을 당할까봐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게 됩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같이 살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살기가 힘들어 이혼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혼만큼은 안 된다.“ 하고 이혼을 하지 않고 사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 때문입니다. 이혼을 하면 아이들이 아빠로부터 혹은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좋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부부가 이혼을 해서 한쪽이 아이를 키우고 있어도 다른 한쪽이 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왜냐하면 “아빠가, 엄마가 너를 버린 것이 결코 아니란다. 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에게 버림당한 것이 큰 상처가 될 수 있기에 이를 막아보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혼은 했지만 자기가 자녀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자녀는 여전히 보고 싶습니다. 도리어 부모 된 자신들의 이혼을 통해서 상처를 받고 있는 내 자녀를 보면 더욱 마음이 애처롭습니다. 눈물이 나고 때로는 통곡이 나옵니다. 이런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되고, 보게 되고, 알게 되면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고, 아내도 남편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누가 누구를 버린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바로 저의 이야기이고 또 여러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때에도 혹은 중고등학교 때에도 친구들 사이에 이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애들이, 학생들이 힘이 듭니다. 청년 때에도 제법 오래 깊게 사귀었던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심히 힘이 듭니다. 때로는 이러한 괴로움과 슬픔을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하여 힘든 시절을 보내는 청년 분도 있습니다. 이럴 때 끙끙대며 이렇게 간신히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버림을 당했습니다. 마음이 심히 아픕니다. 힘듭니다. 저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버림당한 아픔과 고통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이때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이 앉으셨느니라.”(히12:2)
즉 자신이 버림을 당했을 때, 그래서 마음이 심히 힘들 때 버림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여섯 번이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대제사장과 공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때, 기존의 종교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을 때, 로마제국 즉 세상 권력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참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제자들조차 그렇게 예수님을 버릴 줄 몰랐습니다. 네 번째는 자기를 그렇게 따르고 환영했던 이스라엘 동족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들은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눈에는 사나운 독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아 죽여라.” 하고 외쳤댔습니다. 다섯 번째는 자신의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남이 되어 네 명의 남동생과 두 명 이상의 여동생을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하시자 그들 형제와 자매조차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놀랍게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워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악 된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고 참을 수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참기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히 외치는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만큼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도 버림을 당하자 예수님은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처절히 버림당한 예수님의 고통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그 고통을 인내하고 죽기까지 참았기에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비로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마21:42)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결론입니다. 누구나 버림을 당하면 참 힘듭니다. 더구나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면 더욱 힘이 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나도 한 때, 아니 종종 사람을 배신하고 버린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을 필요 없다고 돌멩이처럼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분의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을 버리면 안 됩니다. 그 분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버림당하신 그 분을 내 마음에 영원히 모셔야합니다. 이제 나도 그 분을 위해 버림을 당하는 아픔이 있더라도 잘 참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영광의 부활의 날에 큰 기쁨과 상급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