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스트레스 해결법

날짜: 
2010/02/01
설교: 

마26;36-46 예수님의 스트레스 해결법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가 <스트레스>라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스트레스를 수치로 발표한 내용이 있습니다. 정성적인 배우자가 죽었을 때를 100으로 보았습니다. 이혼 73, 교도소 행 63, 질병과 부상 53, 은퇴 43, 임신 40, 성문제 39, 직업 전환 36, 상사와의 알력 23, 이사 30, 법적으로 작은 피해를 당하였을 때 11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200이 넘으면 병들기 시작하고, 300이 넘으면 미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질병이 있는 임신한 여자가 이사를 가야 하는데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질병(53), 이사(30), 임신(40), 배우자 사망(100), 모두 합하면 223입니다. 병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여자가 스트레스를 다른 곳에서 조금만 더 받으면 미치게 됩니다. 스트레스의 세 가지 별명도 있습니다.
1. 무언의 살인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슬비인데 한참을 맞다보면 속옷까지 적셔집니다. 스트레스가 조금 조금 쌓이다 보면 병이 깊어 어느 덧 돌이킬 수 없는 병 문턱까지 와 있게 됩니다. <앗차!> 하는 순간은 이미 늦었습니다. 스트레스의 징조가 있습니다. 불안, 초조, 불면, 위장장애, 두통 등의 신체장애가 스트레스의 시작입니다. 설사를 자주한다, 위가 아프다, 배가 더부륵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골이 빈 것 같다, 죽을 것만 같다, 암처럼 느껴진다는 증상이 스트레스로 오는 증상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병원에 가도 아무 병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들입니다. 스트레스는 무언의 살인자입니다.
2. 무언의 공격자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사람이 공격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일을 저지르게 되는 공격적이 됩니다. 몇 주 전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41만에 폭설, 6년 만에 영하 16도, 강추위가 한국에 밀어닥쳤습니다. 한 할머니가 노숙자가 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자는 것이 불쌍하여 집안에 들여다가 재웠습니다.
노숙자는 잘 자고 잘 먹고 나서 주인 할머니에게 돈 100만원만 꾸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돈이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노숙자는 할머니와 자녀 두 명을 죽이고 달아나다가 잡혔습니다. 잡힌 후 경찰이 물었습니다. "왜 은혜를 원수로 갚았나요?"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랬습니다."
나중에 그 원인을 조사해봤더니 결국은 스트레스였습니다. 노숙자는 거지로 지내면서 자기가 무시당하는 스트레스를 늘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꾸어주지 않으니까 또 다시 자기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 그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공격형 인간으로 만듭니다. 고로 스트레스의 별명은 무언의 공격자입니다.
3. 인생의 양념
반찬에 양념이 없으면 맛이 없습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양념이어서 스트레스가 없으면 인생에 맛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에 쫓기는 스트레스가 있을 때가 공부가 제일 잘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업가는 남의 사업이 잘되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가장 사업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적당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우리의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양념을 치면 음식을 망치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는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즉 스트레스를 잘 조절하고 현명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야 할 분이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파도처럼 스트레스가 밀렸던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주님, 주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많이 밀려올 때가 언제였나요?" 아마 제 생각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붙잡혔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란 쥐어짠다는 뜻입니다. 그 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감람유를 짜는 틀들이 여기저기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란 이름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겟세마네에서 쥐어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8절) 늘 염려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내가 심히 고민되어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하셨으니 당시 예수님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계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1. 과중한 업무로 시달릴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며칠 전 삼성전자 부사장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삼성전자에 다녔다가 퇴직을 하고 이민을 온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삼성전자 좋지요. 월급 많이 주고... 세계 일류 기업으로 알려져 있어 사원으로서 당당하고... 그런데 그 업무는 장난이 아닙니다. 특히 신제품 개발을 하는데 있어 세계의 타 경쟁회사보다 가장 빨리 가장 좋은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일로 인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저는 지금 퇴직하고 이곳에서 인생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한국 남성의 40대 사망률이 세계 1위인 것은 잘 아시지요? 왜 그렇습니까? 한국 남성 40대가 되면 가장으로서 아이들은 커가고 그들의 학비를 대랴, 집 장만하고 생활비 대랴, 회사에서는 이리저리 눈치 보랴, 체력과 능력은 슬슬 딸리는데 업무는 많아지고... 하여간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할 때가 한국 남성 40대입니다.
여기 캐나다의 경우에는 40대에 직장에서 잘려도 헬퍼를 비롯해 다른 직업을 얼마든지 가지고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아내도 단순 직업을 쉽게 가질 수 있고요. 그러나 한국은 남성 40대에 직장을 잃으면 다른 직업을 갖기가 상당히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중년의 아내가 직장에 나가면 남편은 큰 죄인이 되는 것 같고... 하여간 인생의 코너에 완전히 몰리게 되는 현실이다 보니까 자연히 스트레스로 빨리 죽게 됩니다.
2. 자존심 상할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짐승은 먹을 것으로 살고 사람은 자존심으로 삽니다. 사람들은 자존심 상하면 너무 아파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입니다. 어떤 70세 노인이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 줄을 묶지 않고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개가 공원에 똥을 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를 아주 싫어하는 청년이 개가 대소변을 지려대는 개를 보고 노인에게 핀잔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영감님, 개 줄을 묶어 가지고 다니세요."
노인은 그 말투에 화가 났습니다. 젊은이에게 자존심을 상하였습니다. 옆에 있는 자기 집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낫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낫을 가지고 와보니 그 청년이 없어졌습니다. 그 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 청년 새끼 어디 갔어?"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니, 노인께서 잘못 하시고 왜 그래요?"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말한 사람을 낫으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존심 상하면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자존심을 살려주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지하도에서 거지가 500원짜리 연필을 들고 팔아달라고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500원을 주면서 연필을 안 받고 지나갔습니다.
그때 한 신사가 지나가면서 500원을 주고 연필 하나를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사업가요. 나는 비싼 물건을 파는 사업가이고 당신은 연필을 파는 사업가요. 사업 잘 하세요." 그 거지는 구걸하려고 500원짜리 펜을 들고 있다가 자존심이 살아났습니다. "그렇다. 나도 사업가다. 사업을 잘하자." 그가 나중에 영국 신문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아마 가장 자존심 상할 때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였을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구세주로서 죽고 계신데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조롱합니다. "아니,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더니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구먼! 메시아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침 뱉음을 당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2. 오해받을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동물학자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개를 보고 웃지 마세요. 이를 보이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웃는 얼굴이지만 개에게는 공격의 표현이기에 개가 달려듭니다." 사람들 간에도 코드가 맞지 않아 종종 오해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오해는 오해를 낳고, 결국 오해를 받는 사람은 그 오해를 빨리 풀지 않으면 계속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극심한 오해를 받고 있는 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로마는 민중의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병이어 기적 후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심경을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8절)
예수님은 지금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큰 스트레스가 몰려와도 그 스트레스를 극복하시고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결론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경우를 당하여도 스트레스를 이긴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맡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실 때 사람들은 비웃으며 침을 뱉었습니다.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예수님은 강도 사이에 못박혀 있습니다.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로마 병정들은 죽어가는 예수님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야속했겠습니까?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제자들은 도망가고 없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허전했겠습니까? 이 상황 속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사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은 전혀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안좋을 때 계속 그 사건을 주시하거나 그 사건을 일으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주목하면 스트레스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고로 이때는 사람과 사건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스트레스를 맡겨야 합니다.
2. 여유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 속에는 여유가 들어 있습니다. 다 맡기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겠다고 하는 여유입니다. 스트레스는 대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데서 옵니다.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는 골짜기가 스트레스입니다.
예수님은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 평생에 세계 복음화를 이루시려고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느긋하셨습니다. 12명 제자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계 복음화를 맡기시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단기간에 세계 복음화를 이루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2000년 계획을 세우고 여유 있게 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여 달라는 기도는 여유입니다. 여유를 가진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1,000미터를 달리다가 도저히 체력이 약하여 뛸 수가 없거든 뛰는 것을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 됩니다. 괜히 무리함을 알고도 계속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다가는 스트레스를 받고 쓰러지거나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인생을 바라 볼 때 이 땅의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현실만 바라보면서 바동바동하지 않습니다. 희망의 미래, 희망의 하늘나라까지 바라보니 자연히 여유가 생깁니다.
3.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면 더 좋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늘 같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구하기만 하시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도 믿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안 되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칭찬하는 사람들 중에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변 예수님이 책망하는 사람들 중에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믿음은 말미암아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가장 먼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근심과 문제가 다가오면 근심과 문제를 해결해주실 전능한 하나님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사라지면 스트레스가 다가오고, 그 스트레스는 우리를 파멸시키기 시작합니다. 고로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스트레스가 다가올 때 하나님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나를 도와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도와주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믿음 중에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