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안과 예수님 밖

날짜: 
2006/06/25
설교: 

요15:1-7 예수님 안과 예수님 밖
우리가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이고 분명하고 필연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없이는 우리의 필요가 절대로 충족되지 않고, 예수님 없이는 우리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고,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성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예수님 없이는 내가 살 수 없기에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신뢰하여 예수님을 가까이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알거나 체험해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위인도 아니고, 우리와 같이 김씨 이씨 박씨 같은 대한민국 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우리와 같이 생김새가 비슷한 대한민국 사람도 아닙니다.
그것도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목수로 30년간 살다가 3년간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주로 잠깐 활동했던 사람을 우리가 뭐하려고 믿고, 우리가 뭐하려고 가까이 하고, 우리가 뭐하려고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까? 물론 그 분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가나 도덕가나 사상가나 철학자처럼 뛰어나기에 그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사랑을 실천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었던 희생의 사회사업가이었기에 그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하여 내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가까이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예수님처럼 종교가도 많이 있고, 예수님처럼 사상가도 많이 있고, 예수님처럼 사회사업가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내가 예수님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점에 있어서는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는 좀 무섭고, 유교는 너무 딱딱하고, 이슬람교는 너무 과격하고, 힌두교는 잘 모르고, 그래도 기독교가 가장 고상한 종교인 것 같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가장 고상한 것 같아서 교회에 나와 보았지만 교회 안에는 고상한 사람들이 없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나 아니면 나보다 덜 고상한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신앙은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여자 친구나 혹은 남자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나 애인이 자기를 싫어하거나 자기를 멀리하면, 더 나아가 자기를 배반하면 그와 동시에 신앙이 없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종 듣는 이야기지만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왔는데 그 교회의 장로님한테 사기를 당하여 다시는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만 그렇게 열심히 믿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국 땅에서 적응하기 바쁘고, 연애사업하기 바쁘고, 돈 벌고 먹고 살기에 바쁘고, 텔레비전 보고 컴퓨터 하기에 바쁘고, 사람 만나기에 바쁘고, 공부하고 일하기에 바쁘고, 세상을 즐기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교회에 좀 나오라고 하면 “지금은 너무 바쁩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교회에 가지요.”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사인 저를 비롯해서 믿음이 있는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쯧쯧쯧, 나도 한 동안 저랬었지! 아무리 바쁘게 뛰어도 예수님 없으면 전부 헛수고요, 더 일이 꼬일 텐데! 아이고 주여, 깨닫게 하옵소서!” 같이 한번 따라 합시다. “아이고 주여, 깨닫게 하옵소서!”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말씀에 아멘이십니까? 물론 여기 있는 대부분의 분들이 이 말씀에 아멘 즉 맞는다고 대답하지만 혹 여러분들 중에는 이렇게 대답하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런 자기도취의 말이 어디 있느냐? 자기가 아무리 기독교의 교주라고 해도 어찌 제자들을 싹 무시하고 이런 몰상식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아니, 자기만 잘났고, 제자들은 전부 바보냐? 자신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낮추어야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니 그런 교만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물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은 웬만한 신앙이 아니면 동의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떠나라고 강압적으로 떠다밀어도, 혹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고 죽인다고 해도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까먹지 않고 확실히 알고 있다면 물을 떠날 고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의 예화처럼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인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말라비틀어지는 것처럼, 내가 예수님을 떠나면 말라비틀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혹은 믿다가도 가끔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예수님 없이도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나도 이 외국 땅에서 살 수 있고, 예수님 없이 나도 돈 벌 수 있고, 예수님 없이 나도 공부 잘 할 수 있고, 예수님 없이 나도 성공할 수 있고, 예수님 없이 나도 좋은 신랑, 좋은 신부 만날 수 있고, 예수님 없이 나도 보람차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단 일초라도 살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 예수님을 떠나겠습니까?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14) 즉 부자는 예수님 없이도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좀 잘나고, 자기가 좀 강하고 자기가 좀 가졌고, 자기가 좀 배웠고, 자기가 좀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에이, 예수쟁이들은 전부 나약하고 못난 사람들이야!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맨날 2000년 전에 죽은 예수 보고 도와달라고 떼를 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어찌 보면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쟁이들은 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어찌 들판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쟁이들은 목자이신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기에 항상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리를 이깁니다. 곰도 이깁니다. 사자도 이깁니다. 마귀도 이깁니다. 먹고 마시고 사는 데에 조금도 염려하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인 우리는 약하지만 목자이신 예수님이 강하고 유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양인 내가 사는 길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고, 여기 캐나다에 와서는 더욱 낮선 곳이기에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서 졸졸 따라 다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떠나서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떠나서는 나는 도저히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리를 하나 깨닫는 데에 어떤 사람은 평생을 소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늦게나마 이 진리를 깨달으면 복입니다만 이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 없이 살겠다고 발버둥쳐 보았지만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말라비틀어지는 것처럼 예수님 없이 산 인생은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예수님 없이는 성공 같지만 실패요, 행복 같지만 불행이요, 축복 같지만 저주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과장해서가 말씀한 것도 아니라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때 이 진리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닷가 어부로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리니 두 배에 잠길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하, 내 힘으로는 안되는데 예수님이 말씀하니 되는구나!”
베드로가 이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3년간 쫓아다녔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그는 이 진리를 다시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섰습니다. 그러나 역시 허탕이었습니다. 그때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그 말씀대로 하니 역시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깨달았습니다. “내 힘으로 안되는데 예수님의 힘으로 되는구나!”
여러분,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안되는 일이 있습니까? 빨리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예수님 밖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진정으로 성공을 얻으려면 예수님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너무 고지식한 예수쟁이들의 괴변인 것 같지만 진리는 어쩔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영원하고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과 밖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거리는 예수님 안과 밖의 차이입니다.
당신이 이 외국 땅에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이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결정하는 것이지, 당신의 지식과 외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당신에게는 무한한 용서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밖에 있으면 정죄와 심판이 따릅니다. 성경도 이를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성공이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행복의 요건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불행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슬피 울던 사람이 기뻐 뛰며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저와 여러분이 체험했듯이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다시 말해 ”나는 못한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이런 솔직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된다고 하지 말고, ”나는 부족하오니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서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떠나서 스스로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스스로 성공을 했다고 하는 것은 나중에 보면 다 꽝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nothing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꽝이요 nothing인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진리를 인정하기 원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사는 나는 nothing이요 꽝입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