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인 것과 욕심이 아닌 것

날짜: 
2023/05/27
말씀: 
약1:14-15
말씀구절: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설교: 

‘욕심’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하는 마음” 그리고 ‘욕심’을 한자어로 쓰는데 두 가지로 씁니다. 바로 욕심(欲心)과 욕심(慾心)입니다. 어- 말이 똑같습니다. 둘 다 '하고자할 욕' 과 ‘마음 심’자를 씁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욕’이란 한자어에 하나는 ‘마음 심‘ 받침이 없고, 하나는 ’마음 심‘ 받침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 뭘까요? ’마음 심’ 받침이 없는 욕(欲)은 순수하게 무엇을 하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 심’ 받침이 있는 욕(慾)은 마음(心) 위에 있는 욕(欲)이니 마음 이상의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즉 순수한 욕심, 바른 욕심은 마음의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뭔가 마음에 거리끼고 걸리면 나쁜 욕심이고, 마음에 거리끼고 걸리지 않으면 좋은 욕심입니다.

영어로는 욕심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greed, covetousness, lust 혹은 evil desire라는 단어를 씁니다. 특히 good desire는 좋은 욕심이고 evil desire는 나쁜 욕심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욕심이라고 하면 evil desire 즉 나쁜 욕심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현도 나쁜 욕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욕심을 꿈과 비전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 욕심이고 무엇이 욕심이 아닌 꿈과 비전인가요?

자신이 생각하고 마음먹은 것이 이루어지면 꿈이고 비전이고, 마음먹고 생각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욕심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위험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독재자가 남의 나라를 침략해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나라의 영토를 빼앗고 난 후 자기의 비전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아무리 자기가 생각한 것이 이루어졌어도 그것은 욕심이 이루어진 것이지 꿈과 비전이 성취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꿈과 비전으로 포장된 욕심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누가요? 아- 내가, 각자가 경계해야 합니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목표를 세우면 그것은 욕심이고, 자기 분수에 맞는 목표를 세우면 그건 꿈이고 비전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포장된 욕심도 경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가 남들보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공부도 남보다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수업을 마치면 또 여러 학원을 보냅니다. 돈도 많이 들어갑니다. 부모님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부모님들의 그런 모습이 순수한 자녀사랑이 아닌 자기 욕심 때문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자기 자녀에 대한 집착이나 대리 만족을 얻고자 함이 아닐까요?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 열기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자녀들 외국 유학도 많이 보내고, 심지어 자녀 교육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도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기러기 가족의 부부가 자기 자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렇게 희생을 하면서까지 자녀교육을 시키고 있습니까? 진짜 맞습니까? 혹시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아-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잖아요? 살다 보니 남편이 보기 싫기도 하고, 또 시어머니가 보기 싫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서 살기가 싫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자녀 유학을 이유로 외국으로 피난 가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 캘거리에 오시는 분들은 거의 드문 경우지만 돈이 너무 많아서 외국에서 써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암튼 순수한 사랑 때문이 아니고 자기 욕심에서 기인한 것인데 그것을 착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학생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칫 공부에 자기 분수를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명 ‘탐학’이라고 합니다. 남들 다 대학가고 대학원 간다고 나도 간다는 식이면 그건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하는 재주가 있고, 어떤 사람은 공부에 재주가 없습니다.

역사상 지혜와 지식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 왕의 말년 고백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12:12)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

물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바로 공부를 더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도 별로 유익이 되지 않고 시간 낭비만 하는 공부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망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교만이 더욱 세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고- 애야, 그러려면 차라리 공부를 하지 마라.”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남들하고 똑같이 공평하게 사과 하나를 줬는데, 그걸 공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두 개를 가져야 공평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아- 그건 아니잖아요. 그건 욕심이에요. 욕심쟁이에요. 혹은 더 나아가 자기는 두 개를 얻으려고 막 떼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한국 사람들 중에 그런 분들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헌법 위에 떼법‘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욕심쟁이들이 단체로 뭉쳐서 떼를 씁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그들의 욕심을 들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욕심쟁이가 욕심으로 뭔가를 달라고 떼를 쓰면 들어줍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1-3)

즉 하나님은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안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십계명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이 있고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이 있고, “도적질하지 말라.”는 8계명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겁니까? 그게 비정상적으로 욕심에 이끌려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어느 교도소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살인을 하여 사형수가 된 사람들 중에 65%가 욕심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 들어온 죄수들 중에 85%가 욕심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사단과 귀신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왜 천사들이 타락하여 사단과 귀신들이 되었습니까? 다름 아닌 욕심 때문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왜요? 아- 분수를 모르고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어보려는 욕심이 발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이 예뻐했던 다윗왕도 보십시오. 이미 아내들이 7명이 있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또 욕심이 발동해 남편이 있는 남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습니다.

참- 사람의 욕심이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잠언 27: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덤과 죽음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여러분,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결국 나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해집니다. 고로 우리는 욕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교훈집인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자는 자신의 욕심을 조정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자는 욕심에 조정을 당한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욕심에 조정을 당하는 사람입니까? 욕심을 조정하며 사는 사람입니까? 욕심을 조정하며 사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좋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욕심에 조정을 당하고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그 욕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 욕심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욕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엡4:22) 마치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욕심이라고 하는 옛 사람이 입었던 좋지 못한 낡은 옷을 벗어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욕심의 때나 더러움이 묻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둘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즉 욕심이라는 나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아예 죽여 버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욕심을 죽였는데도 또 욕심이 살아나면 다시 그 욕심을 죽이고... 그렇게 날마다 욕심을 죽이고 살라는 겁니다.

셋째,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여러분,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예수님의 영입니다. 고로 성령 충만이 임하면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욕심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약해지면 마귀의 마음인 욕심이 들어오게 됩니다.

넷째,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는 나보다 못 먹고, 나 보다 못 살고, 나 보다 못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까먹고 계속 모자란 것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만 올려다보면서 자꾸 불평을 하고 욕심을 냅니다.

그러면 욕심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결국 욕심이라고 하는 깊은 늪에 빠져서 인생이 계속 허우적대고 불행해지고 맙니다. 피곤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고로 현재 내가 가진 것에 “아- 이만하면 괜찮다. 나보다 없는 사람도 많은데 뭐.” 하는 만족하는 마음, 즉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지만 솔직히 저도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늘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원망 불평이 나올 수 있고, 자칫 우울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고로 자족하는 마음은 욕심을 제거하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기분을 다스리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다섯째, 움키지 말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캐나다의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UBC) 대학에서 부자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에 가장 행복했습니까?” 이 질문에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조금 투자 했는데 많은 이익을 남겨서 행복했다. 사업이 계속 잘 될 때에 행복했다. 유능한 사람을 영입해서 행복했다.”

그런데 가장 공통적인 대답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번 돈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용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조사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단 그 돈을 남을 위해 사용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욕심과 행복은 도저히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결론입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기쁨을 위해 그 욕심을 제어하십시오. 그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