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을 풀어라.

날짜: 
2022/01/09
말씀: 
눅18:1-8
말씀구절: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설교: 

‘원한’이란 억울한 일을 당하여서 생긴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생긴 응어리를 가리킵니다. 아마 인생을 살면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평생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곳은 아직 완전한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원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한국 역사를 통해 볼 때 수많은 침략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 전체가 큰 고통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힘없는 절대 약자인 백성들의 경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꾹-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병이 생기고, 그것이 쌓여 원한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한이 맺혀서 죽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돌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이 된다는 사상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물론 잘못된 귀신론입니다. 귀신은 하늘의 천사들이 타락하여 이 땅으로 쫓겨난 것이지, 결코 원한이 맺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아닙니다.

여기 캐나다 땅이 아무리 살기 좋아도 여기 역시 천국이 아닙니다. 여기도 억울한 일, 원통한 일이 생기고, 얼마든지 원한 맺히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땅은 우리들에게 고향 땅이 아니기에 더욱 쉽게 원한이 맺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한은 보통 멀리 있는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로 인하여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고 하신 것처럼 가까운 사람들과 오래 지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로 말미암아 원한이 맺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부부간에도 원한이 맺히기 쉽고요. 가족들 간에도 원한이 맺히기 쉽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교인들 하고도 원한이 맺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원한을 우리의 마음에 품고 살면 그것이 우리의 정신 건강이나 육체 건강에 심히 좋지 않습니다. 응어리지고 원한에 사무친 마음은 우리에게서 기쁨과 행복을 뺏어갑니다. 고로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응어리 진 마음, 원한을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원한을 풀어야 할까요? 성경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벧전3:9),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롬12:21) 그리고 나에게 원한을 맺히게 한 그 원수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지도 말고, 도리어 그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주라고 합니다.(벧전3:9)

아니, 원한이 맺혀서 속이 뒤집어지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비명이 나올 지경인데, 도리어 그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주라니요? 차라리 한바탕 싸워야 원한이 풀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방법으로 원한을 풀려고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원한이 맺힐 때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성경은 그럴 때 자기의 사정과 형편을 낱낱이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마치 힘없는 과부가 날마다 재판장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듯이 그렇게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요, 하나님께 합한 사람인 다윗도 인생을 살면서 원통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시142:1-2) 동방의 의인 욥도 큰 고통 중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욥10: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원한이 맺힐 때 하나님께 아뢰지를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폭력적이 되거나, 자기의 인생을 비관하거나, 자기를 그렇게 만든 그 사람과 그 환경을 원망합니다. 그러다가 술과 좋지 못한 약을 찾게 되고, 결국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그 옛날 야곱이 그랬고,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안타까워서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나의 원한을 일일이 감찰하시고, 그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라.“(삼하16:12) 예레미야도 고백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애3:58)

성경에 보면 '신원의 날(Jubilee)'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원한과 원통함을 풀어주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인하여 남의 노예가 되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원한이 맺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원한 맺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합니다. 일명 50년 만에 한 번씩 있는 ‘희년’이란 겁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의 예수님은 이런 희년을 선포하러 오신 분이고,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고로 이제는 원한을 풀기 위하여 굳이 50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그 사정과 원통함을 아뢰면 하나님이 듣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보면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함을 당한 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상소제도입니다. 임금님이 있는 대궐 밖 문루에 큰 북을 매달아서 누구든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으면 이 북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님이 듣고 달려 나와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금님이신 하나님도 자기의 백성들이 억울하고 원통함을 당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사정을 낱낱이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듣고 그 원한을 속히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왜 하나님이 풀어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눅18:7) 즉 확실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겠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있을 때 그들은 새로 태어난 아들들을 나일 강의 악어에게 던져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자녀를 악어 밥으로 던져야만 하는 부모의 원한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을 괴롭힌 바로와 그 군대들을 멸하셨습니다.

또한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진하며 고생할 때 뒤에 떨어진 연약한 노약자들을 괴롭힌 아말렉도 때가 되매 그들을 멸하심으로 그 옛날의 원한을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두 눈이 뽑힌 삼손의 원한도 풀어주셨고, 아이를 갖지 못해 멸시와 서러움을 당하고 사는 한나의 원통함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원통함도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는 매일 하면서, 반대로 자기가 남에게 원한 맺히게 한 것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삽니다. 그러니 마귀가 그의 기도를 참소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 남에게 많은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는 기도는 합당치 않습니다.”

즉 내가 알게 모르게 상처 입힌 그 분들의 원한을, 최대한 미안해하고, 회개하고, 보상해줌으로 풀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의 원한을 풀어주실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21장에 보면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 다가와서 나라가 심히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제가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고 응답합니다. “이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로 원한을 맺히게 했기 때문이다.” 즉 남을 억울하게 원한 맺히게 하면 자기도 그 대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찾아가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속죄해야 너희들의 원한이 풀어지겠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왕이여, 이 일은 은금으로 풀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학살하기 위해 모해한 사람들의 자손들을 우리들에게 내어주소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달겠나이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을 학살한 사울의 집안사람 7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져 3년 기근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원한을 풀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이건 네가 스스로 원한을 풀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사자성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결자해지’. 영어로 말하면 "One who has tied a knot must untie it." 해석하면 “매듭을 묶은 사람이 그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즉 네가 먼저 남의 죄를 용서해주면 하나님이 너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요, 네가 먼저 남의 원통함을 풀어줘야 하나님도 너의 원통함을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세의 사람들은 이미 성경에 예언한 대로 원통함을 쉽게 풀지 않습니다.(딤후3:3)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스스로 마음이 좁아져 쉽게 원한이 맺히고 미움이 쌓여져 갑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었어도 여전히 그 사람과 사이가 안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탁합니다. 스스로 원통함을 푸십시오. 제발 꽁- 귀신을 물리치십시오.

옛말에 “원한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99개의 은혜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한 개의 섭섭하게 한 것을 꽁-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즉 스스로 원한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애야, 이 원한은 네가 스스로 풀어야 한다. 넓은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사랑해보아라. 그러면 그 원한이 자연스럽게 풀어진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넓은 마음으로 스스로 맺힌 원한을 스스로 풀어야 합니다.

아니, 자기가 묶어놓고 왜 남보고 풀라고 합니까? 그리고 자기가 묶어놓고 왜 하나님보고 풀라고 합니까? 자기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하인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나도 하나님을 성품을 닮아서 그 원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희망찬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묶은 원한을 계속 가지고는 도저히 새 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원통함을 푸십시오. 그리고 남에게 원한 맺히게 한 일은 늦더라도 회개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원한도 밤낮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완전히 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