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사람들이 기분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경우가 있지만 일단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1943년 미국의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우( Abraham Maslow)라는 분이 인간의 욕구를 5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1. 생리적 욕구(본능적 욕구) : 수면욕, 식욕, 성욕(요즘 미국에서는 유명인들의 소아성욕으로 인해 말이 많음)
2. 안전의 욕구 3. 사랑과 소속의 욕구 4. 존경의 욕구 5. 자아실현의 욕구 / 그런데 이런 5가지 욕구가 다 채워지기만 하면 인간은 모두 100% 기분이 좋고 행복할까요? 저는 이 욕구 중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뭐지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욕구 즉 영적인 욕구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지어질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영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신을 찾으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신을 찾고 그 신을 만나면 욕구가 채워져 기분이 좋습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하긴 하지만, 종교 의식은 행하지만 거기서 신을 만나지 못하면 결국 나중에는 점차 활력을 잃고, 시들해지고, 허무해지고 맙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은 역시 신 즉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 분의 사상을 공부하고 따르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핵심은 인격의 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고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를 신약 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하면 ‘코이노니아(교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코이노니아를 통한 기쁨, 평안, 행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신만이 주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입니다. 마약을 하시는 분들이 계속 마약에 집착을 하는 것은 마약만이 주는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줄 수 없고 어떤 물질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는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물론 순간적인 마약보다 더욱 강력한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안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멸할 때 “종교는 마약(아편)이다.”라고 하면서 탄압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큰 기쁨을 얻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여전히 계속 행복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행복합니다. 요즘처럼 COVID-19의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는 순간에도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위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과의 교제가 이루어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떳떳이 외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사람은 앞서 말한 인간의 5가지 욕구가 다 채워져도 뭔가 허전합니다. 영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인이 나옵니다. 복음성가 가사에도 나오는 아주 유명한 여인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당시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는 그 여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5번이나 이혼한 경력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우리 주위에 보면 5번이나 이혼한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5번이나 이혼을 했으니 얼마나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겠습니까?
더구나 지금도 또 한 남자와 동거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용감하고 유능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세상 말로 팔자가 센 여인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 여인은 인물, 즉 외모가 상당히 괜찮았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인박명입니다. 미인들은 남자들이 가만 나두지 않기 때문에 팔자가 세다는 말입니다.
근데 이 여인이 계속 남자를 바꾸어보아도 그 남자들로부터 자기가 추구하는 만족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곳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즉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구가 채워지고 만족해진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 보면 주인공처럼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누구지요? 사자입니다. 특히 사자가 나오면 다른 동물을 사냥하여 잡아먹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자가 배불리 먹으면, 즉 식욕의 욕구가 채워지면 드러누워 잠을 잡니다. 수면의 욕구를 마저 채우려는 겁니다.
그리고 종종 암컷과 수컷이 짝짓기도 합니다. 성욕의 욕구를 채우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동물의 왕국에 보면 사진 촬영 기술의 발달과 학자들의 노력으로 동물에게도 본능적 욕구뿐만 아니라 나머지 욕구 즉 안전의 욕구, 사랑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영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신을 찾으려는 마인드 즉 영적 욕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신에게 찬양하거나 신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다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신과 교통하는 채널과 시스템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나귀의 눈을 잠시 열어서 영적 존재인 천사를 보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일회성으로 하는 것이지 나귀가 영적 존재이기에 천사를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있어야 비로소 참 만족을 얻게 됩니다.
어린 아기에게는 우유(젖)이 필요합니다. 배가 고프면 아기는 젖(우유) 달라고 웁니다. 그리고 아기는 잠도 새근새근 푹 자야 기분
이 좋습니다. 즉 본능적인 수면의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품에 있어야 안전을 느끼며,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와 돌봄을 통하여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친구와 이성을 통하여, 혹은 사회 구원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또한 자신이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것을 달성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지금 인간의 5가지 욕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떠냐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5가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다 보면 짧은 인생이 다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욕구는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5가지 욕구가 신앙인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신명기 8:3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국어실력이 모자라서 이 말씀을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육신의 떡도 필요하고 영적인 떡 곧 하나님의 말씀도 필요하다는 뜻이지, 육신의 양식은 필요 없고 하나님의 말씀만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육체적 욕구가 있습니다. 근데 그 욕구가 절제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것을 탈선했다, 혹은 타락했다, 혹은 죄를 지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는 ‘절제’라는 열매도 있습니다. 혹시 이러한 욕구로 인해 종종 시험에 빠지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절제의 은혜가 작동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즉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의 욕구를 절제하며 억누르며 죽이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 어떤 분은 ‘고행’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고행의 삶이 싫다 혹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좀더 세상 쾌락을 누리고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예수님을 믿겠다는 분도 종종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분은 솔직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의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도 벅찹니다. 말세에는 더욱 힘듭니다. 갈수록 더욱 힘듭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인격과 능력으로 죄를 모두 이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의 욕구를 100%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다윗왕도 죄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여 결국 남의 아내를 빼앗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지만 순간순간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 사위인 다윗을 계속 죽이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죄의 욕구가 일어날 때 신속히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꾸 죄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려고 해요. 나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혹 죄의 욕구를 이기지 못해 죄를 지으면 신속히 하나님께 회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죄를 안 지었다고 오리발을 내밀면 결국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정직하지 못한 태도로는 하나님과 교제를 계속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과 교제하기를 좋아합니다.
불교의 경우를 보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인간의 욕구를 통제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속세를 등지고 산으로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도리어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내 안에 있어서 그 분의 능력으로 죄의 욕구를 이기고 살면 진짜 크리스천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죄의 욕구에 져서 죄의 욕구대로 살면 날라리 신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의 욕구를 따라갈 수도 있고, 거룩한 성령의 욕구를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고 자기의 인생을 체크해 보십시오. 혹시 육체의 욕구대로 살고 있다면 신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교제가 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행복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