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은 사람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날짜: 
2016/04/29
말씀: 
창6:5-8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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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폴레옹이 근무시간에 잠을 잔 병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서 그 병사의 마을을 지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병사의 애인이 나폴레옹의 행차 소식을 듣고 행렬 앞을 막아섰습니다. 나폴레옹이 “무슨 일이냐?”고 외치자 그녀는 “폐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재차 물었고, 그녀가 바로 자기가 얼마 전 사형선고를 내린 병사의 애인이며, 사랑하는 그 사람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군인이 근무 시간에 자는 것은 사형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나폴레옹을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폐하, 은혜를 받는데 자격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아마 이 여인은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에 대한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11:5-6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는 말 그대로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존재로부터 받는 은총, 사랑, 혜택 등을 뜻합니다. 즉 은혜는 누군가의 노력이나 대가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높으신 분이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선물은 값을 주고 파는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공짜로 주고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확실하게 구별되는 시대구분이 있습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 전과 노아의 홍수 후입니다. 이때부터 지구의 환경이 이전과 크게 차이가 났습니다. 즉 홍수전에는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고목나무처럼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는 환경이 파괴되어 사람의 수명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의학이 발달되어 수명이 조금 늘어나고 있는 추세지만 노아의 홍수전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긴 수명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것 아시지요? 여러분이나 저나 다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당시 노아에게는 아내와 함께 셈과 함과 야벳이란 세 아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내 즉 세 명의 며느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 같은 한국 사람들은 이 세 아들 중에서 셈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을 셈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이것도 아시고 있지요? 그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덟 식구 중에서 누구 때문에 살았습니까? 바로 그들의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고, 시아버지가 되는 노아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이때 초등학생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응- 노아는 큰 배를 지었어요. 엄청나게 큰 배요. 진짜에요. 굉장히 큰 배를 지었어요.” 아-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창6:9)“ ”아-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의인이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그런데 과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인이고,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동행했을까요?“
즉 그가 의인이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을 했지만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그가 홍수를 피하고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은 자칫 더 큰 여러 가지 오답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좀더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그가 의인이었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성경에는 그녀도 의인이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 아들들과 세 자부들도 의인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남편이요 아빠요 시아버지인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 때문에 다른 7명의 사람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물론 이런 대표성의 원리는 적용이 될 때가 있고 적용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타락하므로 온 인류가 타락한 것으로 봅니다.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한 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죄가 용서받는 것, 이것도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아내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믿지 않은 그녀의 남편도 구원 받고, 역시 믿지 않는 그녀의 자녀들도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는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즉 어떤 동물원이나 극장에 들어갈 때도 단체 티켓이 있고, 개인 티켓이 있는 것처럼 구원도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이 될 때가 있고 적용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만약 그가 의인이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나님이 그의 여덟 식구들을 구원시켰다면 노아의 형제들은 왜 구원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노아의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과 사돈들은 왜 구원시키지 않았습니까? 이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이지요. 엿장수마음이지요.” 좀더 신학적인 말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은혜입니다.”
또한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하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완전한 의인일까요? 아닙니다. 그도 역시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남들보다는 덜 지었다는 것입니다. 즉 노아가 아무리 착하다고 할지라도 그 역시 그의 의로움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는 이런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즉 모든 사람이 홍수로 멸망을 당했지만 노아는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받은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7명의 식구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지옥의 심판을 당하지 않고 천국을 상속으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2:5에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잘 살기를 원합니다. 번영하기를 원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실력을 쌓습니다. 좋은 대학도 나오려고 하고, 좋은 기술을 배우려고 합니다. 또한 인간관계를 잘 가지려고 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얻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자기의 행복과 성공과 번영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자신의 행복과 성공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행복, 진짜 성공, 진짜 번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자신의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이 자칫 꽝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비록 그가 인간적으로 부족하더라도 남들보다 더욱 행복할 수 있고, 남들보다 더욱 성공과 번영에 일찍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처녀 총각의 경우 결혼 배우자를 나름대로 고릅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장래가 있는 사람입니까? 나도 모릅니다. 너도 역시 모릅니다. 만약 이걸 100%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혼 배우자를 고르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것입니다.
한국 옛날이야기에 보면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보 온달이 어떻게 하여 아름답고 지혜로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까? 누가 중매를 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온달이란 사람이 남들보다 훌륭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을 만나 고생합니다.
아- 이게 내 뜻대로, 사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생연분이란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늘이 그렇게 정해주었다는 겁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우리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면 그는 실력이 부족해도 남들보다 앞서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그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라.”(전9:11)
저희 교회 합심 기도 제목 네 가지 중에 보면 마지막에 ()를 만들어서 그 안에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넣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 제목에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한 번 더 종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가 인생을 살면서 이제 60세가 가까이 옵니다. 나름대로 목회를 하면서 좀더 아름다운 결말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힘으로는 잘 안됩니다. 능력이 부족합니다. 인격도 부족합니다. 여러 모로 부족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꿈은 있고, 소원은 있고, 바램은 있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주여, 능력과 실력과 인격은 부족해서 도저히 안 되겠고, 그냥 하나님이 ‘옜다. 이거 하나 먹어라.‘ 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주여, 이전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한 번만 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플리즈! 플리즈(Please)!”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나름대로 뜻이 있어 여기 캐나다 땅에 왔습니다. 다들 행복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행복할까요? 누가 번영할까요? 누가 좋은 배우자를 만날까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그는 행복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에 좋은 모습으로 나를 갖추는 겁니다. 어떻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야고보서4:6에는 이런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합니까? 스스로 잘났다고 으스대거나 뽐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들보다 높아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지 마십시오. 내가 스스로 무엇을 이루었다고 또 무엇을 이루겠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못산다는 겸손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 각자가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보다 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다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굉장히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