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55:6 이때 하나님을 만나라.
지난 주 우리 교회 한 성도님이 장로교단의 어느 교파에 대하여 저에게 물었습니다. 장로교단은 거의 100개 정도나 될 정도로 교파가 많기 때문에 저도 잘 대답을 못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단은 자기의 교회를 표시할 때 교단 명칭과 교파 명칭을 앞에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캘거리의 한인교회들이 '앨버터저널이란 교민신문에 연합으로 각각 교회광고를 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보면 각각의 교회 앞에 교단 명칭이 붙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교 장로회(통합) 000교회' 식입니다.
그런데 침례교나 감리교, 성결교, 혹은 순복음 교단은 교단 수가 적기 때문에 특별히 앞에 교단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교단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입니다. 약자로 하면 '기하성'이고, '여의도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순복음' 하면 그 자체가 순복음 교단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교단 명칭을 안 써도 구별이 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연합 광고에 특별히 교단 명칭을 붙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이런 구절이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캘거리 순복음 중앙교회' 이 구절은 제가 이곳 캘거리에 교회를 개척할 때서부터, 그러니까 15년 전부터 사용해온 구절입니다.
즉 제가 여기 캘거리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장 바라는 것은 이곳에 온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며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인생을 보람 있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즉 신앙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신앙의 과정과 신앙의 마침도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저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대통령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영화배우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돈 많은 갑부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합니다. 괜히 신령한 사람이 덜 신령한 사람들에게 뽐내려는 말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니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간증과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을 만나지도 않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기록을 했다면 성경은 아마 가장 거짓말이 많이 담긴 책일 것입니다. 즉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이 진짜 하나님을 만났든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에이, 그것은 거짓말이다."라고 생각을 합니까? 혹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들이 과거에 하나님을 만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여러분! 만약 과거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현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조금 이상해집니다. 즉 과거는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현재는 죽은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과거는 인간을 만나주신 하나님이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인간을 만나주지 않는 변심한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여러분! 이 성경구절을 한국어로만 해석하려면 의미가 잘 전달이 되지 못합니다. 즉 한국어에는 시제 표현이 뚜렷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제가 정확한 영어로 해석하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믿음의 조상 혹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을 그 옛날에 만나주셨지만 과거의 하나님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시제는 항상 현재형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살아계셔서 현재에도 우리 각 사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쉽게 생각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만나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때때로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의 신랑으로 표현합니다.
고로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도 못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또한 고린도후서 6:2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다른 말로 하면 BC(Before Christ) 시대에는 하나님이 아주 특정한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말씀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합니다. "아브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또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모세,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고, 그들에게 사명을 알려주셨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좋으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세상 말로 '수박 겉핥기 식'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수박은 쪼개서 그 안에 과즙을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수박이 아름답고 잘 익어도 쪼개서 먹지 못하면 수박은 한낱 장식물이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형식만 갖추지 말고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주셨다면,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들을 만나주고 있습니다. 고로 지금은 '성령께서 가라사대' 시대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미천한 남종과 여종에게조차 찾아오셔서 만나주신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성령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직접 내 안에 오셔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시대입니다. 이미 성령이 임하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영이 살아계신 분들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이나,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혹은 환상이나 예언, 혹은 말씀과 한경을 통하여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고 하는 시대는 성령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원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고로 교회에 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만나도록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듣도록 하십시오.
특히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냐고요? 배부르고 등 따뜻할 때가 아닙니다. 내가 큰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입니다. 이상합니다. 인간은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환난이 닥치면 그때에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즉 사람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좋은 환경이 다가오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여러분! 혹시 지금 심한 고난에 처해 있고 큰 문제가 있습니까? 그때가 하나님을 만날 가장 좋은 때입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하고 심히 상했습니까? 그때도 역시 하나님을 만날 좋은 시기입니다. 혹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까? 왕따가 됐습니까? 외롭습니까? 그때도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에 좋을 때입니다.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시20:1)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여러분! 재물이 많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여 내 주위를 두를 때에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하나님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내 주위를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가끔 보면 믿는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도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홀로 처해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사인입니다.
한국에서 여기 캘거리로 오게 하신 이유도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중고등부나 청년부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에게는 지금 친구가 중요할 겁니다. 혹 애인이 중요할 겁니다. 그러나 친구나 애인을 만나는 것 더욱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상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30세가 되어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런데 그 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1-2)
아니,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이 임했는데 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시고 40일간 굶게 만드신 것입니까? 기왕이면 예수님을 호화궁궐로 인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지 않고요? 그 이유 중 하나는 호화궁궐보다는 광야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기가 더 좋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기도생활하고 영적 훈련을 하기가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서 6개월 먼저 나신 세례 요한도 하나님이 그를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훈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무슨 훈련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영성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보십시오.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충만을 받자 하나님은 그를 아라비아 광야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훈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들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아니, 광야로 내 몰아버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애급을 떠나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살 길이 열립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살길이 막막한 분이 있습니까? 이곳 캘거리 땅에서 나는 무얼 먹고,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염려가 되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때가 바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혹시 "에이, 나는 지금 괜찮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다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여유를 갖는 분이 있습니까? 물론 여유는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두고 여유를 가져야지, 하나님을 멀리하고 여유를 갖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십시오. 어린 사슴이 어미 품을 떠나 혼자 멀리 떨어져 풀을 뜯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자 밥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들은 평안해도 주님 안에서 평안해야 합니다. 축복을 누려도 주님 안에서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주님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주님 없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즉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들은 항상 주님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여러분!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예배에 오는 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환경이 어려워지고, 사람 간의 관계가 어려워지고, 물질이 궁핍해지고, 몸이 아프거나 할 때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맞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입니다. 특히 여기 캐나다의 삶, 외국 생활이 힘이 듭니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제가 한국에 전도사로 있을 때 오산리에 있는 순복음 기도원에 있은 적이 있습니다. 보통 배부르고 등 따뜻할 때에는 사람들이 기도원에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렸다든지 아주 큰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기도원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누가 기도하라, 예배드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예배드리고, 알아서 기도굴에 들어가 울며불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즉 환난이 그를 몰아가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고로 지나고 보면 환난이 도리어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같이 하나님의 사명인 하늘나라를 가꾸어 가는 중에 큰 보람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