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세 가지 발견

날짜: 
2016/06/25
말씀: 
사6:1-8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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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시작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다 왕국이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뜻입니다.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닥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밖으로는 강대국 앗수르가 유다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쳐들어 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왕국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적으로는 그렇게 강력하였던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정치를 잘한 왕입니다. 웃시야라는 말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웃시야 왕은 하나님만이 나의 힘임을 믿고 믿음으로 정치하였습니다. 그는 16살에 왕이 되어 52년이나 나라를 통치하며 유다를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암몬 나라가 조공을 바칠 정도로 강력하였습니다. 군대를 재정비하고 요새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말년에 교만하여져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그만 문둥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웃시야 왕이 죽자 앗수르는 호시탐탐 유다 왕국을 엿보고 있는데 유다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죄악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기 중에 위기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발견으로 이사야는 나라를 구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1. 하나님 발견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에 돈 있는 사람, 인물 좋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서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모습인지 천사들도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또 다른 두 날개로는 감히 하나님 앞에 발을 보여 드릴 수가 없어서 발을 가리고, 여섯 날개 중 겨우 두 날개로만 날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사야는 새로운 선지자로서,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도, 베드로도, 모세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난 후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한 일은 단지 성전에 들어간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니까 본 것이지 이사야가 하나님께 면회 신청을 해서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그리고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도, 그리고 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에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주권이 계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내게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옵소서!”
혹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하던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의 선입관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아야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지 않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분이 장님이라고 해봅시다. 그는 장님이라 어떤 사물도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만질 수 있다면, 그리고 또 다른 감각을 사용해서 사물과 사람을 경험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또 다른 감각, 즉 영의 눈과 영의 귀, 영의 감각을 열어주면 가능합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는 교회 게시판에 있듯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 집에 가면 아버지를 만나듯이 성전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그냥 내 생각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격자이기에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고, 우리와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습니다. 고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나타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은총을 입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죄 발견
하나님이 쓰려는 사람은 먼저 성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제일 싫어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버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난 후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어두울 때는 몰라도 햇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자세히 보이는 경험을 우리는 합니다. 즉 나 혼자 있을 때에는 죄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 서면 죄가 낱낱이 보입니다. 이사야는 혼자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하나님 앞에 서니까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죄란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겁니다. 즉 화살이 표적을 벗어나듯이 마음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쪽으로 가는 것이 죄입니다. 특히 우리는 말로 짓는 죄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고 했고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무엇보다 자기가 너무나 많이 입으로, 말로, 혀로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못된 말, 악한 말, 독한 말, 속된 말, 헛된 말, 이간하는 말, 참소하는 말, 교활한 말, 거짓말, 부정적인 말, 파괴적인 말, 불신의 말, 낙심의 말, 한탄의 말... 등 참으로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안 좋게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이러한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는 이런 잘못된 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하고,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하듯이 우리 타락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좋은 말보다는 좋지 못한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스랍 즉 하나님의 영광을 호위하는 천사가 하나님의 단에서 숯불을 하나 꺼내어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사6:7) 즉 성령의 불로 입을 지진다는 것입니다. 입에 할레를 행하고, 입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말이 나오는 입을 깨끗한 말이 나오는 입으로 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습니다. 즉 크게 사용할 사람도 있고 작게 사용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아예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그릇과 함께 말도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또한 선지자로 쓰시려고 부르실 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네 발에 신을 벗으라.’고 하신 명령이었습니다. 즉 모세가 더러운 신을 벗는 일, 즉 죄를 먼저 버려야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경우도 보십시오. 그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두 배가 가득하게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렇게 베드로가 자기 죄를 깨닫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고백을 하니까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고 베드로를 제자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탈무드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많은 여자 성도들이 랍비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랍비는 한 명 한 명 정성을 다하여 손을 머리에 얹고 축복안수를 하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가 축복 기도를 받으러 와서 랍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랍비는 그 여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머리 위에 멀찍이 손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축복기도가 끝나자 그 여자가 물었습니다.
“랍비님, 다른 여자들에게는 정성껏 몸에 손을 대고 안수기도를 하여 주시고 왜 제 머리에는 손을 대지 않고 기도하십니까?” 그러자 랍비가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촛불을 끌 때 불에 손을 대고 끕니까? 아니면 멀리에서 후- 하고 바람을 일으켜 끕니까?”
그러자 여자가 대답합니다. “불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뜨거우니까요” 그때 랍비가 말을 합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당신의 몸에 손을 대면 내 몸이 뜨거워질 것 같아 나는 손을 대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내 영을 맑게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하고 부단히 투쟁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애쓰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자고로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는 민족과 개인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3. 사명 발견
웃시야 왕이 죽고,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고, 앗수르는 쳐들어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나라를 구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때 이사야가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때로부터 이사야는 백성들 앞에 나서서 외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 사명감을 발견하십시오. 교회에서도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하찮고 귀찮은 일일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자원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 청소라든지, 어린이 장난감 정리라든지, 도서관 책 정리라든지, 음식으로 봉사하는 거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을 할 때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는 사람을 쓰시지 “주여, 나는 그렇게 위험한 일, 더러운 일은 하기 싫습니다. 나는 대접만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축복만 해주십시오.” 하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때는 마음이 답답하였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또한 사명을 발견하므로 성전을 나올 때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기 때에 나라를 구하는 선지자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오늘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회개하며 사명을 찾으므로 인생의 나머지 기간에 한 번 더 씀임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