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끝에 도달할 때

날짜: 
2016/06/19
말씀: 
눅2:41-51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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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의과 대학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으스대는 두 명의 의대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의대생이 견습생으로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이건 분명히 류마티스 관절염이야.”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습니다. “천만에, 저건 디스크가 틀림없어.”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는다고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서로 감정이 나빠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힘겹게 물었습니다. “저…화…화장…실이 어디죠?”
여러분, 사람은 각자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통하여 사물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경험과 지식에 사람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되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왜 기도가 이렇게 응답되지 않는 것인지, 이럴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내 생각과 내 사고 방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해의 끝에 도달할 때, 즉 한계라고 하는 벽에 부딪힐 때 어떠한 자세를 갖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의 끝에 도달할 때 낙심하기 쉽고, 원망하기 쉽고,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탈선하기가 쉽습니다.
이전에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왔던 시라소니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싸움꾼이 아니었습니다. 1916년에 신의주에서 장로님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본래 이름은 ‘이성순‘인데 ‘성’자는 거룩 성(聖)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이기정 장로님은 그의 전 재산을 바쳐서 신의주 삼일교회를 세우는데 큰 공로를 한 분이십니다
또한 시라소니 자신도 이 삼일교회의 부설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 재산을 교회에 바쳤기 때문에 집이 매우 가난해졌습니다. 시라소니는 이렇게 아버지가 하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에게 반발하고 열일곱 살에 집을 뛰어나와 싸움판을 찾아다니며 싸움 실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40대에 이르러서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와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젊었을 때 자기의 생각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러한 일들을 만났을 때, 즉 그 위기 상황을 좀더 잘 대처를 했더라면 그러한 방탕의 길로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생각으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인생의 중요한 고비요, 그때 어떠한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있었던 군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유격 대장으로서 사병들을 훈련시킬 때 한 신입 병사가 유격훈련 중에 탈영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병을 발견했는데 한 교회에서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병은 상당히 믿음이 좋은 병사로 부대에서는 ‘목사님’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 병사에게 탈영 동기를 물었더니 자신은 이런 훈련을 받는 것을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훈련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더 이상 훈련을 받기가 싫었고 결국 탈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각에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그는 탈영이란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지혜와 지식의 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아이들 때에는 어른의 말과 행동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어른의 말과 행동이 이해가 안 될 때 어린이가 계속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면 어른이 참 난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너도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다. 지금은 말을 해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이럴 때 어린아이가 “알았습니다.” 하면 되는데 개중에는 끝까지 가르쳐 달라고 우기고 따지고 덤비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그치면 좋은데 자기가 이해가 안 된다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즉 파괴적인 행동이나 탈선의 길로 나아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때 부모로서는 자녀들에게 보다 깊은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어 위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살다보면 이해의 끝에 도달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상대방의 행동과 습관, 그리고 사고방식과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남자와 여자는 겉으로의 생김새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도 차이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도저히 배우자의 그런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갈등을 합니다. “내가 배우자를 잘못 고르고, 잘못 택했나? 그때 좀더 신중하게 기도를 했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러한 차이점으로부터 오는 갈등에 대해 올바르게 대처를 못합니다. 즉 별거와 이혼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지경까지 도달하는 분들을 보면 저 역시 오랫동안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애틋한 동점심이 갑니다. 그리고 “오죽하면 그렇겠나!” 하고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즉 이해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 시점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안 될 때 참고 인내하는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원수 사랑을 우리에게 이루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의 원수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이민 교회는 교단과 교파가 서로 다른 성도님들이 오기 때문에 그에 따른 차이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즉 교단마다 다른 정치제도가 있고, 성경해석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까지 오신 분들은 대부분 개성이 강한 분들이 오기 때문에 그 사이에 이해의 갭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개성이 강한 쪽으로 나타나기가 쉽습니다. 즉 인내하고 용서하기보다는 분열하고 다투기가 쉽습니다.
고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에게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점이 점점 크게 느껴지더라도 인내와 용서로, 그리고 사랑으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즉 올해 우리 교회 합심 기도제목처럼 그때에 한 번 더 기도해야 하고, 한 번 더 인내해야 하고, 한 번 더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의 끝에 도달하게 될 때 바른 자세를 가지면 이해의끝에서 추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번데기가 나방이 되어 고치에서 벗어나서 훨훨 날게 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계기를 맞게 됩니다. 즉 이해의 끝에 도달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하여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가 중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가사가 쓰인 사건을 아십니까? 하루는 ’슈몰크‘라는 목사님이 심방을 다녀와 보니 집에 불이 나서 두 아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목사이지만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때 슈몰크 목사님은 지금은 이 일을 현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는 또 다른 선한 계획이 있는 줄 알고 감사하며 쓴 것이 바로 이 찬송가가 생기게 된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그 부모에게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모든 식구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린 예수님은 부모님에게 허락도 없이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 되는 요셉과 마리아는 크게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아들 되는 예수님이 하는 말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납득하기 힘든 말을 했습니다.
이때 모친인 마리아는 비록 그 말의 뜻을 당장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습니다. 즉 지금 당장은 예수님의 말을 잘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잘 새겨두므로 나중에 예수님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찌 하수가 신의 경지에 이른 고수의 수를 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피조물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다 알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억지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신 신학자들처럼 자신이 이해를 할 수 없다고 성경을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나보다 훨씬 아이큐가 좋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이시니까 무슨 뜻이 있겠지! 주여, 그 뜻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이해의 끝에 도달할 때 바른 자세를 가지면 신앙이 발전됩니다. 인격이 성장됩니다.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즉 위기가 나를 더욱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주고, 나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고로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이것을 보다 좋은 기회로 승화시키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