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소자 하나에게

날짜: 
2023/09/09
말씀: 
마18:5-10
말씀구절: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설교: 

생전에 저의 아버님이 저의 어머님에게 옛날 일을 꺼내시면서 가끔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초등학교 2-3학년 때였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소풍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님이 무슨 중요하고 바쁜 일이 있으셨던지 저에게 김밥도, 도시락도, 과자도 싸주지도 않고, 저만 혼자 학교에 달랑 보냈습니다. 엄마는 나중에 도시락을 싸서 소풍 장소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점심 식사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랑 같이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저는 한쪽 구석에서 우두커니 엄마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장군이야. 울지 않아.” 하고 스스로 달래면서 그날의 소풍을 혼자 쓸쓸히 마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렸을 때 일어난 그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종종 그날을 기억하면서 저의 어머님을 탓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린 아들이 소풍을 가는데 도시락도 싸주지 않고, 애를 혼자 보내는 엄마가 어디 있어.” 그래서 제가 안겁니다.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건 엄마가 너무 했다.”

그런데 제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돼서 “아- 나도 내 어린 자녀에게 알게 모르게 그런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뭐- 자녀가 아주 어리지 않고 성인이 되었어도, 아빠로서 나도 모르게 자녀가 어려울 때 같이 동행해주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 아이가 말도 못하면서 난감해하고 슬픈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안 좋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 그때 저 순간에 내가 딸과 같이 동행해주고, 뭔가 힘이 되어줘야 했었는데...” 하면서 큰 아쉬운 마음과 함께 “주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꿈의 사건에 영감을 받아서 오늘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은 어린이, 소자, 작은 자에 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요즘처럼 여성이나 어린이의 인권이 그리 존중되지 않고 도리어 무시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자 “애들은 가라.” 하고 야단치고 쫒아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심히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19:13)고 하시며 그들을 축복하고 안수기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어린이를 불러서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마18:5)고 하셨습니다.

반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나오는 어린이 혹은 소자, 영어로 little ones는 과연 누구를 뜻할까요? 12살 이하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을 뜻할까요?

이에 대해 제가 온라인을 통해 좀 찾아보니 “소자란 단지 체구가 작고 나이가 어린 아이들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돈과 지위와 힘이 없어서 무시를 당하는 약자들을 가리킨다.”고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말씀을 합니다. 이에 덧붙여 제가 한 가지 더 진실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집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체중이 7kg가 나갑니다. 아주 소형견은 아니지만 대체로 소형견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가끔 저희 강아지를 보면서 반갑게 “Puppy!” 하고 지나갑니다. 즉 강아지 중에 ‘귀여운 새끼 강아지’라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가 웃으면서 속으로 대답합니다. “애 Puppy 아닌데... 버-얼써 6살이 지났는데...”

여러분, 강아지 나이를 사람과 비교하려면 대충 곱하기 7을 해야 합니다. 즉 저희 집 강아지는 6×7=42살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어느덧 중년입니다. 그래서 가끔 저의 강아지가 투정을 부리고 땡강을 부리면 우리가 말합니다. “애야, 너 이제 아기가 아니야. 어린이도 아니야. 너도 이제 어엿한 중년 아저씨라고, 그러니 체통을 지키세요.”

그렇게 말하면 그 아저씨 강아지가 “아하, 그렇구나. 나도 중년 어른이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체통을 지켜야지.” 하고 투정을 그칩니까? No. 아닙니다. 계속 아이처럼 투정을 부립니다. 찡찡- 댑니다. 자- 여기서 퀴즈를 낼게요. 지금 이 강아지는 사람으로 치면 성경에 본문처럼 소자입니까? 아닙니까?

몸집으로 보면 7kg 밖에 안 나가는 소형견이니 소자일 테고, 나이로 계산하면 42살이니 어른일 테고, 찡찡- 대는 것을 보면 여전히 소자일 겁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가 저의 식구들에게는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어린이 혹은 아기 혹은 소자입니다. 왜 그렇지요? 이 강아지를 아기 때부터 집에 데리고 와서 키워서 그렇습니다.

즉 부모처럼 강아지를 사랑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강아지는 여전히 아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강아지랑 산책을 하다가 아주 사납고 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다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걸 보면서 “어이쿠- 무서워. 덩치도 되게 크다.“라고 쳐다봅니다.

그런데 그 개를 처음 아기 때부터 키운 주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개는 아무리 덩치가 크고 사나와도 여전이 baby, 소자, little one처럼 느껴집니다. 왜 그렇지요? 바로 부모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본문에 나오는 소자, little ones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소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90세 먹은 꼬부랑 할머니가 70세 되신 머리가 하얀 아들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애야, 항상 차 조심해라. 밖에 공기가 차가우니 감기도 조심하고...” 그 말을 들은 70세 되신 아들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에이- 어머니, 제가 뭐 애인가요? 저도 이제 어른 아니 할아버지라고요? 어머니나 건강 잘 챙기세요.”

자- 보십시오. 90세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그 아들이 70세 노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어린 아이, 즉 소자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 그의 사랑 안에서 창조되고 지어진 피조물들은 모두가 불쌍한 소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분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보면 하나님은 “아이쿠- 불쌍한 내 새끼들!” 하며 마치 부모가 가엽게 자기 아기를 보듯이 불쌍히 보신다는 겁니다.

더구나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행복의 에덴동산을 잃고, 가시와 엉겅퀴에 이리저리 찔려서 아파하고 신음하며,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자신의 새끼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그 새끼들이 가련하고 불쌍해서 울고 싶습니다. 아- 잃었던 자기 자녀를 다시 찾고 싶습니다. 빨리 그들에게서 가시를 빼주고, 그들을 치료해주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도 증거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시니라.”(눅7:1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보십시오. 예수님이 배고픈 사람들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시고, 그들의 모든 병을 치료하시고, 죽었던 과부의 아들도 살리시는 큰 기적을 베푸셨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애들아- 어때? 나 능력이 굉장히 많지?” 하며 조금은 뽐내는 마음으로 그런 기적들을 베푸셨나요? 아닙니다. 단지 그 어린 것들이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캐나다에 살다 보니 종종 한국과 캐나다를 비교하게 됩니다. 한국이 좋은 것은 무엇이지요? 일단 모든 것이 빨리빨리 됩니다. 병원 치료도 빠르고, 관공서 서비스도 빠르고, 각종 음식 배달도 빠릅니다. 반면 캐나다는 느려 터졌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매우 답답합니다.

반면 여기 캐나다가 좋은 것이 있습니다. 장애인이나 약자들에 대한 인식과 그들을 돕는 시설이나 시스템이 잘되어 있습니다. 저의 딸이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영어를 전혀 못할 때였습니다. 애가 영어를 못하니까 자기만 바보라고 학교에 안 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학교에서 이 소자 하나를 위해 영어 교사를 붙여주었습니다.

아- 참 고맙기도 하고, “그래, 이런 것이 바로 선진국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캐나다에 살면서 애들 우유 값이 18세까지 매달 나오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세금도 감면해주고, 각종 혜택을 주는 것을 보면서 “야- 세상에 이런 정부가 다 있네. 이거 너무 좋다.” 하고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65세 노인이 되면 노인 연금이 매달 일인당 1500불-1800불 가량 나옵니다. 그 외 치과 치료비, 약값 보조비, 안경 보조비, 침대 구입비 등 각종 혜택도 주어집니다. 즉 노인 같이 힘없고 불쌍한 소자들, little ones를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강한 자가 힘이 없는 소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2:2-4)

즉 가난한 소자들을 차별하면 그건 악한 생각이요, 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 무식한 자들, 장애자들, 믿음이 어리고 의심하는 자들을 차별하여 그들로 실족하게 하여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 교회에 못 나오게 하면 그건 큰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0절에도 말씀합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반면 이런 약한 소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잘 보살피면 주님이 나중에 상을 줍니다. 주님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악인과 의인을, 그리고 양과 염소를 나눌 때에 바로 이것, 즉 불쌍한 소자들을 너희가 제대로 보살폈느냐 안 보살폈느냐는 기준으로 그들을 한쪽은 영생으로, 한쪽은 영벌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31-46)

결론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피조물들은 어리고 불쌍한 소자들입니다. 우리도 서로를 볼 때 이런 하나님의 마음, 이런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와 나를 불쌍한 소자로 보시고 계속 보살펴주시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들도 만나고 대하는 그 작은 소자들을 서로 불쌍히 여기고, 잘 돌보시며,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