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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생이 매우 짧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요, 인생을 산다는 것을 광야에서 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만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 동서양 아기들 모두가 ‘하하하하 깔깔깔깔’ 웃으면서 태어나지 않고, ‘으앙-‘ 하고 울면서 태어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울면서 태어나지 않고, ’방긋-‘ 웃으면서 태어난 사람 있습니까?
혹은 태어날 때 “엄마! 수고했어요.” 하고 제법 효성스런 말을 하면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이룰 때에는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에 ‘방긋-’ 웃으면서 태어날는지... 하여간 지금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 살기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인생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들아- 인생 살기 참 힘들지? 수고스럽고 매우 무겁지? 더구나 고향 땅을 떠나 외국 땅에서 사는 너희들은 오죽 힘이 들겠냐? 그러기에 내가 너희를 초청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의 이 유명한 구절에서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살면서 수고하고 무겁지 않고, 참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아마 깨달음이 오시는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에이- 목사님! 인생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힘들지요. 그러니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딩동댕!“ 정답입니다. 물론 인생 살면서 좋을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고, 보람이 넘칠 때도 있고, 평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생은 역시 고난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인생의 자랑조차도 수고와 슬픔뿐“(시90:10)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120년의 인생을 산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고백입니다. 이제 막 57세의 인생을 산 저의 말보다 더욱 더 신뢰성이 있는 고백입니다.
이런 인생을 내가 산다는 것은 역시 그 누구에게도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뒤돌아보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삶이요 허무한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수고스럽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인생 자체가 힘든데 예수님께 오면 뭐 인생이 바뀌는 것이 있습니까? 인생에 있어 뭐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겁니까? 인생이 힘들지 않다는 겁니까?
정답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 대신 인생을 살아주시면 인생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인생을 사는 것이 매우 쉬워집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나아가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되고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신을 자각하는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가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 생각대로 믿고, 예수님에 대한 판단도 자기 나름대로 했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항상 자기였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진리에서 크게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하나님께 원수 되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인생을 사는 바울로 인해 그 당시 교회가 핍박을 받고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길거리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 왜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너만 고생이 된다. 그렇게 인생 살지 마라. 이제 성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네게 가르쳐 줄 자가 있느니라.”(행9:4,6)
그리고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보내 그에게 안수기도하게 하시고 바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 다시 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합니다. 그때부터 바울의 인생이 바뀌어졌습니다. “아- 내가 인생 잘못 살았구나! 내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정반대로 행동했구나!” 그렇게 깨닫고 인생을 다시 살게 됩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인생에서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어디를 가도 주님이 가고 싶은 데를 가고, 어디를 머물러도 주님이 머물고 싶은 데를 머무르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도 자신은 당시 아시아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주님이 마게도냐 지방, 오늘날로 말하면 유럽으로 가라고 하시니 자기의 생각을 즉시 접고 주님의 생각을 따릅니다. 즉 인생의 주인이 자신에게서 주인 되시는 예수님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냥 ‘믿습니다.’ 하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삶이, 내 인생이 아주 180도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 인생 내가 주인이었고, 내가 중심이었지만, 그리고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살았습니다. 나의 고집도 십자가에서 죽었고요, 나의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았고요, 나의 그 세상적인 잘난 모습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아멘입니까? 노멘입니까? 글세입니까?
저의 경우는 예수님 믿기 전에 사도 바울처럼 세상적으로 그리 잘난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염려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이 험한 인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대학은 나와서 어디에 취직해야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야?” 물론 나름대로 생각은 있었지만 인생 산다는 것에 그리 자신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깨달은 것이 있는데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 이게 실력이 그리 많지 않은 나에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나에게 주어진 육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고, 나에게 주어진 주위의 사람들이지만, 이에 대한 주인은 내가 아니요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단지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책임도 영광도 주님께 있고요, 잘돼도 못돼도 주님이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실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회하는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그러니 내 인생 내가 살지 않고 주님이 대신 살아주시면 상당히 괜찮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여 삼창’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을 들어보면, 내가 주인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여, 내 말 좀 들으세요. 주여, 내가 시키는 대로 잘하셔야 합니다. 주여, 내 말 안 들으면 당신하고 나하고 관계 끊어집니다. 교회 안 다닌다고요.”라고 주님을 협박하며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한때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16:22). 즉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님이 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인생은 네 멋대로 살지 말고 주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실패 지점에 가보면,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결정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결정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자로 살아가면서 늘 뒷걸음질치고, 실수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주된 이유는 말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여전히 주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 자아가 주인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만족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고백한 것은 “이제 내 삶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은 단지 우리에게 어떤 격언을 소개시켜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거듭나지 않는 크리스천은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살면 여전히 악취가 납니다. 계속 무겁고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인생을 살아주면 향기가 납니다. 인생이 쉽고 가볍습니다. 내 힘으로는 사랑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면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과연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고 있는가? 내 안에 예수님이 여전히 활동하시고 있는가?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즉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사는 인생이 아니면 그 인생은 낙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말세에는 예수님을 믿어도 차지도 덥지도 않게 믿는다고 합니다. 즉 양다리 걸치는 신앙의 삶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영광은 자기가 받으려고 하고, 어려울 때는 예수님께 사정사정 부탁하여 예수님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아침에는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고, 밤에는 내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하고 결정적인 때는 마귀가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아- 이래서는 안 됩니다. 좋을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도 제목도 이것입니다. “주여, 인생을 내가 살면 실패합니다. 힘듭니다. 그러니 제발 오셔서 제 인생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영광도 주님이 받으시고요, 모든 일을 주님이 원하는 대로 이루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