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힌바 된 그것을

날짜: 
2016/09/11
말씀: 
빌3:12-14
말씀구절: 

...

설교: 

어떤 집안에 도박에 미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 도박에 사로잡혀 집안에 며칠씩 들어오지 않는 것은 예사요. 도무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도박에 미치다가 결국 부모님이 남겨준 재산을 다 잃고, 아내도 자식도 같이 못살겠다고 떠나자 이제는 도박을 끊어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손가락을 작두로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손가락이 아물자 또다시 도박장으로 달려가 뭉그러진 몽당손으로 다시 도박을 하더라는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느냐 하면 도박이라는 잘못된 습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습관이나, 잘못된 사상에 사로잡히면 짧은 인생이 망치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어지럽게 되고, 국가도 멸망의 길을 걷고 맙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독일인 히틀러가 민족 우월주의에 사로잡히자 자신들이 온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또한 일본 사람들이 군국주의에 사로잡히자 그들도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자신들도 원자폭탄을 맞지 않았습니까? 또한 옛 소련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공산주의에 사로잡히자 스스로 자유를 잃어버리고 축복도 번영도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주체사상에 사로잡혀 외국의 좋은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의 길, 후퇴의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한국을 비롯해 오늘날의 세계는 극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서로간의 사랑이 식어지고, 미움과 증오가 일어나 결국 멸망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즉 무엇에 사로잡히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삼손이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히자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군인 일천 명을 상대로 승리를 얻은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들릴라라는 기생에 미혹되어 사로잡히자 하나님과의 언약도 깨트리게 되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 눈이 뽑히고 조롱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사울왕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암몬 사람도 물리치고, 블레셋도 물리치고, 국가의 기강도 세우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함으로 말미암아 악신에 사로잡히니 나중에는 정신병자가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기 전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의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고 크리스천들을 옥에 가두고, 심지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데 가편 투표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도 그는 자신의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고 멀리 다메섹까지 원정 가서 크리스천들을 옥에 가두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잘못된 생각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온통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진리, 예수님의 복음에 사로잡혀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은 예수님께 잡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에 사로잡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핍박자요, 훼방자요, 살인자가 되기도 하고, 반면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사도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생각이나, 좋지 못한 성격이나 습관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면 그 신앙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결국 잘못된 신앙, 끝이 안 좋은 신앙, 오히려 교회를 파괴하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려운 이민생활, 유학생활에서도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하늘나라를 아름답게 세울 수 있고, 끝도 좋아지게 됩니다. 오늘 스스로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는 과연 무엇에 사로잡혔는가? 말세의 사람들처럼 혹시 이기주의,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 편협주의에 사로잡혀 자기도 고통을 당하고, 가족들도, 남들도 고통을 당하게 만드는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처럼 하나님께 사로잡혀 이 이국땅에서도 꿋꿋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는가? 여러분,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직업이 천하고 가정적, 사회적, 정치적인 배경이 좋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사로잡히자 그들로 인해 하늘나라는 건설되어져 왔습니다.
여러분, 여기 캐나다에는 무엇에 사로잡혀져, 그리고 누구에 사로잡혀서 온 것입니까? 남편이 끌어서 왔습니까? 아니면 아내가 끌어서 이민을 왔습니까? 아니면 부부가 마음이 맞아서 왔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자녀들 교육 때문에 왔습니까? 만약 가족이나, 이웃, 친구, 친척이 끌어서 캐나다에 왔다면, 그 뜻은 사람에게 잡혀서 왔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변하기 쉽고, 죄짓기 쉬운, 불완전한 사람에게 사로잡혀서 이곳에 왔다면 과연 이 이국생활에서 당신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글쎄요, 잘 모르겠다.’가 아닌, 분명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즉 이 이국땅에서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잡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잡아줄 때 내가 존재하고, 하나님이 나와 나의 가족들의 건강을 잡아주고, 하나님이 나의 직장과 사업을 잡아주어야만 이 이국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하나님이 잡아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사람에게 잡혀서 교회 온 것 같고, 아무개라는 사람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지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요, 일군이지, 저와 여러분을 부른 분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께 잡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지, 불완전한 사람에게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잡힌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께 잡히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며 홀로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까?
저의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어머님의 권유로 집 앞에 있는 교회에 나갔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주일날도 제대로 하나님께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친구들과 놀러 다니거나 나의 취미 생활이나 세상 쾌락에 사로잡혀 지냈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내 중심적인 생활을 하다가 어쩌다 한번 교회에 가면 내가 무슨 하나님께 큰일을 한 것처럼, 그리고 어머님께 큰 효도를 한 것처럼 스스로 대견해하고 위안을 받았었습니다.
더구나 가끔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내 신앙이 다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성령을 받고 나니 내 신앙은 변했습니다. 주일날만 하나님께 잡히는 것이 아니라, 수요예배가 있는 수요일 날도, 철야예배가 있는 금요일 날도, 그리고 청년 구역예배가 있는 토요일 날도 하나님께 잡혔습니다. 그렇게 예배에 잡히다 보니까 술친구들, 세상 친구들과 자연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만 하나님께 잡히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써야 된다고, 내 소유가 전부 하나님께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내 의지도, 내 주장도, 내 생각도, 내 마음도 하나님께 잡히려고 좇아가는 생활, 즉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쾌락에 잡혀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면 마치 소금물을 마신 것같이 계속 갈증을 느끼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좇아가면 거기에는 생수가 터지고 삶의 진정한 기쁨과 보람 그리고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무엇에 사로잡혀 사느냐, 그리고 무엇을 잡으려고 좇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달려있습니다.
이 이국땅에서도 하나님께 사로잡혀 하나님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을 산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천국의 기쁨과 행복과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헛된 것들을 잡으려고 산다면 거기에는 저와 여러분의 미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없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 성령을 받고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꿈속에 아주 잘 닦여진 고속도로가 곧게 펼쳐져 있었고, 그 도로 옆에 악취가 진동하는 큰 쓰레기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쓰레기더미 속에서 사과 상자만한 큰 박스를 서너 개를 골라서 고속도로 위에 놓았습니다. 그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 성냥과 이쑤시개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길, 쓰레기, 성냥, 이쑤시개,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그 당시 일기에다가 적어만 놓고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이것을 보는데 그 해석이 떠올랐습니다. “아하, 잘 닦여진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이고, 쓰레기는 바로 냄새나고 더러운 죄를 짓고 사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고, 성냥은 불을 붙이는 도구이니까 성령의 불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쑤시개는 고기를 먹고 나서 사용하는 것이니까 윤택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구나!”
이것을 종합해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쓰레기 같이 더러운 인생을 살았던 너 원효야, 이제 쓰레기장에서 내가 너를 잘 닦여진 예수그리스도의 길 위에 올려놓았으니 너는 이제 이 길을 따라 성령의 불을 붙이면서 살아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고 윤택한 생활을 보장해 주겠노라.” 할렐루야!
아니 게 아니라 저는 이곳 캐나다 앨버타에 와서 세계적으로 좋다는 앨버타 비프를 진짜 지긋지긋하게 먹었습니다. 불고기요? 어휴- 교회에서 매주일에 불고기를 먹으니 얼마나 먹었습니까? 장장 19년을 거의 매주 먹었습니다. 못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아마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불고기 어디 식당가서 시키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만약 제가 예수님의 길을 벗어난다면 저는 다시 쓰레기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고기도 못 먹고, 이쑤시개도 사용하지 못하고, 윤택한 생활도 끝장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잡혀야 살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얻을 수도 없고, 천국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여러분,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길을 벗어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께 잡히지 않고, 예수님을 떠나 산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요, 평안이 아니요, 그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가난이요 저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옥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누구에게 잡히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누구를 잡으려고 좇아가시겠습니까? 천국과 축복 그리고 행복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지옥과 저주, 슬픔과 고통의 주인공인 세상 마귀입니까? 그 옛날에도 그랬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잡히고, 누구를 좇아가느냐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결정해야합니다. 아무쪼록 짧은 인생을 살 때 이 외국 땅에서 예수님께 잘 잡히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삶을 끝까지 잘 이루다가 저 영원한 천국에서 즐거운 모습으로 만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