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감당하라

날짜: 
2017/12/01
말씀: 
롬15:1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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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캐나다를 가리켜 ‘장애인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장애인을 위한 시설과 시스템이 잘 갖추어졌다는 뜻입니다. 공공시설에도 보면 장애인 표지판이 많이 있어서 그들에게 항상 우선권을 주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도 따뜻합니다. 그러기에 장애인이나 그 가족들은 캐나다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캐나다가 한국에 비해 첨단산업의 기술력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캐나다가 살기 좋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장애인을 돌아보는 따뜻한 마음씨 때문입니다. 사실 선진국과 비선진국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함께 시설 공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크게 ‘신체장애’와 ‘정신장애’로 나눠지며 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활동에 제약을 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선천적 장애인’과 교통사고나 질병 등을 통하여 장애를 갖게 된 ‘후천적 장애인’으로 나눌 수 있고, 후천적 장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장애인이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한국의 어느 아파트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집은 다름 아닌 내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집을 찾아가려고 이리 저리 다녀보았지만 도저히 내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 이상하다! 도대체 내 집이 어디로 간 거야?” 하며 몇 번 더 시도를 해보았지만 결국 찾지를 못했습니다.
할 수 없어서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을 찾아가려고 하는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참 난감합니다. 그렇게 집을 찾아서 헤매다가 꿈을 깨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갑니다. “아하- 이게 말로만 듣던 노인성 치매구나! 하나님이 내가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기도하라고 보여주시는 거구나! 주여- 제가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며칠 전에 제가 인터넷 뉴스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보고 들었습니다. 자기 가족 중에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는데 그 할머니가 대소변을 못 가려서 집안을 난장판을 만든 장면을 사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를 돌보는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정말 힘이 든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에도 치매에 걸리신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처음 제가 부임해 갔을 때는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급기야는 집을 나가면 잘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경찰서에서 자주 그 분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 권사님이 연세가 80대였었는데 그 분을 돌보는 따님도 홀로 되신 60대 권사님이었습니다.
늙으신 두 분이 방 한 칸에서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의 삶 속에서 피곤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애쓰는 60대 권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 하나님을 믿던 권사님도 치매에 걸려서 저렇게 인격이 훼손을 당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노인이 되어서 치매에 걸리지 않았으면 참 좋은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한경직 목사님의 경우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 분이 노년에 은퇴를 하여 남한산성의 한 조그만 집에서 기거를 하셨는데 그만 치매 증상이 와서 주위 사람들이 난감하고 힘들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평생 40여 년간 목회를 하며 대교단의 총회장 직을 지내시고 은퇴한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축도 순서를 맡았습니다. 그 분이 강단에 올라가 두 손을 번쩍 든 채로 이렇게 축도를 했습니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교인들이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이 순간적으로 치매 증상이 온 것입니다.
치매뿐만 아니라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여러 종류의 후천적 장애인이 되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인이 되지 않았으면 참 좋은데 피치 못할 이유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한 병사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그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전 이제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함께 갈 친구가 있어요." "그렇게 하려무나." 부모님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그를 만나보고 싶구나."
"우선... 부모님이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병사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요. 지뢰를 밟아서 다리 하나와 팔 하나를 잃었거든요. 그는 갈 곳도 없고요.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지내고 싶어요." "안됐구나! 얘야... 아마 우리가 그가 살 곳을 마련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나는 그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요." "얘야..."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구나.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쩌면 우리에게 큰 짐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태껏 우리끼리 잘 살아왔어. 우리는 우리 삶에 이런 골칫덩어리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 생각에는 너만 집으로 오고 그 친구에 관한 것은 없었던 것으로 하면 싶구나. 그는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 있을게다."
잠시 후 아들은 아무 소리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경찰에게서 그들의 아들로 여겨지는 한 남자가 한 빌딩에서 추락사 한 것 같다고 전화로 알려주었습니다. 경찰관은 아마도 자살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깜짝 놀란 병사의 부모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고 시체공시소에서 그 시체가 자신들의 아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그 청년이 아들임을 금방 알아보았지만 여태껏 그들이 모르고 있던 것을 알고는 경악스러웠습니다. 그들의 아들이 바로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병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장애인의 사정은 참으로 딱하게 생각하고 동정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그 장애인을 돌보기에는 너무나 희생이 많이 요구되고, 그 희생을 치르기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 자기 자녀가 장애인이 될 때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앞선 병사의 이야기에서처럼 그 장애를 당한 병사가 자기 아들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부모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아마 그 장애인 아들을 껴안고 "애야, 용기를 내라. 희망을 잃지 말자." 하고 그를 격려하며 그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으면서 평생에 아들의 곁에서 돌보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인에 대한 이런 사랑과 격려가 비단 자기 자녀, 자기 가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가족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웃을 생각할 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나한테 늘 좋은 칭찬의 말만 하고, 나에게 늘 밥을 사주고, 나를 늘 좋아하고, 나에게 항상 유익이 되고, 나에 대한 비난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만 가리켜 이웃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만이 네 이웃이니 그런 사람만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인은 우리의 이웃이 아닙니까? 꼭 육체적인 장애인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정신적 장애인으로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혹 어떤 분은 그런 장애인들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장애인과 내가 띠려야 띨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에 있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남녀가 결혼을 했는데 나중에 자녀들 낳고 보니 배우자에게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겁니다. 고치기가 힘든 장애입니다. 그로 인해 앞으로의 내 인생이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여러분의 경우는 어떡합니까? 제가 결혼을 한 지 이제 26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제가 저의 집 사람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저 양반이 심각한 장애가 있었구나!”
여러분! 이상하게 듣지 마십시오. 제 집 사람도 저에 대하여 “아하- 저 양반이 저렇게 못 말리는 장애가 있구나!” 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에게도 못 말리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고통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때 생각나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즉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나의 십자가가 장애인인 내 아내, 내 남편,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구, 내 교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두 가지 정도 못 말리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사실적이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죄악을 범하고 타락한 이래로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병이 들은 장애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하고, 구세주가 나타나 그들을 치료해야 하고 그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육체적인 장애인들을 고쳐주셨고, 정신적인 장애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장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장애자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3-14)
즉 주님은 우리들에게 장애자를 돌아보면 너희들에게 복이 된다, 상급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애자를 돌아보며 받는 상급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장애자를 만나야 합니다. 어디에서 장애자를 만날까요? 가정에서요. 교회에서요. 사회에서요.
제가 얼마 전 예배 중에 이런 고백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민 목회 20년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아- 내가 이제까지 장애자를 상대로 힘든 목회를 했구나!’” 혹시 여러분 중에 이 말을 오해하여 기분이 나빴으면 용서하십시오.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을 장애인으로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라 저를 비롯해 인간은 누구나 못 말리는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떡합니까? 그게 주님이 주신 내 십자가요, 여러분의 십자가입니다. 한편 그것은 우리들의 큰 상급이요 축복입니다. 오늘 12월 3일은 국제 연합이 지정한 ‘국제 장애인의 날(International Day of People with Disability)’입니다. 같이 장애인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너도 나도 장애인이니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의 못 말리는 부분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말씀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해도 안되는 참으로 못 말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장애인인데 어찌합니까? 나에게 준 십자가요 축복인데 어찌합니까? 내가 그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들은 누구나 죽음의 순간에 일급 장애자가 됩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그때는 약해지고 맙니다. 내가 죽은 다음 내 장례를 내 손으로 치룰 수 없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죽은 시신을 처리해줘야 하고, 내 장례를 치러줘야 합니다. 나도 역시 장애인으로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장님이 앉은뱅이를 돌보고, 앉은뱅이는 장님을 서로 돌보면서 살아가듯이 이 세상은 그렇게 서로 약한 부분들이 있기에 서로를 도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쪼록 옆에 계신 장애인을 돌보는 중에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도착할 때 주님이 “내가 맡긴 장애인을 돌보고 오느라고 수고했다.” 하는 칭찬과 상급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