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요즘 캘거리에 보면 도로 공사를 참 많이 합니다. 특히 이전에 있던 도로의 건널목 코너를 뜯어내고 다시 새롭게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교통 체증도 심하고 운전하기에 상당히 불편합니다. 캘거리에 있는 도로의 건널목 코너가 한두 개나, 수십 개도 아니고 수백 개 혹은 수천 개가 될 텐데, 그런 큰 공사를 큰 불편을 끼쳐가며 하는 것을 보면서 “어- 이거 왜 이러지? 돈도 꽤 많이 들 텐데.”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만드는 것을 자세히 보면서 의문이 좀 풀렸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새로운 건널목 코너는 도로 쪽으로 좀 더 튀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보행인이 건널목을 건너는데 이전보다 좀 더 빠른 시간에 건널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건널목에 있는 도로와 인도 중간에 있는 턱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휠체어가 쉽게 통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눈이 오거나 얼음이 생겨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홈이나 돌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즉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새로 만드는 겁니다. 물론 차량 운전을 하시는 분들은 코너 도로가 이전보다 좁아졌으니 좀 불편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장애인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감수해야 할 겁니다.
제가 이전에도 장애인을 돌아봐야 한다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깜짝 놀란 것은 그 설교를 준비하고 난 후 달력을 보았는데 그 설교를 하는 날이 바로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하, 주님이 장애인을 서로 돌아보라는 뜻이구나.”
그런데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혹시 이 설교를 할 때가 또 장애인의 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옛날에 장애인을 돌아보라는 설교를 할 때에 그 날이 ‘장애인의 날’이란 것을 달력을 보고 알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그 날이 정확히 몇 월 며칠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장애인의 날이 도대체 언제지?” 하고 찾아보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장애인의 날은 4월 20일입니다. 그리고 UN이 정한 ‘국제 장애인의 날’은 12월 3일입니다. 바로 이번 주 금요일입니다. 또 오늘의 설교인 ‘장애인이 장애인을 돌아본다.’는 설교와 날짜가 매칭이 됩니다. 아- 참, 신기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미리 준비하는 목사가 먼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캐나다와 한국을 비교하면 서로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캐나다가 한국보다 좋다고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장애인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 시설들, 그리고 제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은혜 받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반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괴롭히는 것은 마귀의 마음이요, 타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약한 자나 장애인을 깔보고 무시하고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한국에서는 “병신, 00한다.”라는 장애인을 아주 심하게 조롱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안 좋은 말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귀먹은 자(청각 장애인)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시각 장애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레19:14) “소경(시각 장애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2:18)
또한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주님,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즉 언어 장애가 있으므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출4:10)라고 주저주저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누가 소경(시각 장애인)을 만들었으며 누가 귀머거리(청각 자애인)를 만들었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4:11)
즉 하나님은 장애인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요한 사역자로 장애인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장애인의 그 장애를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치료자로 오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 이가(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마11:3)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맹인(시각 장애인)이 보며, 앉은뱅이(지체 장애인)가 걸으며, 문둥이(한센씨 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청각 장애인)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여라.“(마11:5)
오늘의 본문에도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눅14:13-14) 즉 예수님은 장애인을 초청하여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하늘의 상급을 받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진 자, 잘난 자, 강한 자를 초대하고 그들과만 교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살면 당장은 너희들끼리는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 하늘의 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잘못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만나야 할 사람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못난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입니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 못 가진 사람입니다. 아멘입니까? 크게 아멘해 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겉으로는 아멘은 해도 속으로는 노멘이나 ‘주여, 아시지요.’ 하고 좀 주저주저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결혼 배우자를 찾을 때 장애인을 자기의 배우자로 생각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크리스천 청년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고를 때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자 + 믿음이 좋은 자를 고릅니다. 불신자보다 한 가지 조항이 더 많습니다.
더욱이 + 성격이 좋은 자 + 대화가 잘되는 자 + 직장(재물, 집)이 있는 자 + 인물이 받쳐주는 자까지 고르려고 하면 결국 거의 완벽한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살아보신 분들은 잘 알겁니다. 그렇게 거의 완전해 보였던 배우자가 과연 완전합니까? 아니잖아요. 그냥 처음에는 눈에 콩깍지가 껴서 그렇게 보인 것뿐입니다.
그러다 콩깍지가 벗겨지고 현실 속에서 겪어보니 어떻습니까? “우와- 내가 이런 사람하고 여태 살았구나! 앞으로는 이 사람과 어떻게 살지?” “아니, 왜 그런데요?” ”아오― 이 사람 말 못할 장애가 있어요.“ ”그래요? 그런 장애인과 살면 안 되나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도 장애가 있잖아요?“
여러분, 제가 62살이 되어서 올해가 결혼 30주년인데, 이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하, 내가 이제까지 장애인하고 살았구나!”라는 깨달음입니다. 물론 결혼 초기에는 저희 집사람이 그런 장애가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 장애가 뭔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소개하면 일종의 강박증입니다.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아 잔소리 그만 그만!”
물론 저희 집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도 강박증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말합니다. “지금 그 말 몇 번이나 하신지 알아요? 이제 그만 좀 해요. 지긋지긋해요.” 그러면 저도 집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그 말 그만 좀 해.” 아- 참, 웃깁니다.
더구나 요즘은 나이가 먹어서 건망증인지 치매 초기인지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더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 설교 때는 이러지 말아야지! 성도님들에게 했던 말 자주 하면 안 되는데....” 하고 다짐하고 될수록 간단히 원고를 작성하고, 원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장애인입니다. 이 세상에 장애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체 장애나, 정신 장애, 성격 장애나 혹은 영적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로 인생은 장애인들끼리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끼리 살면서 서로 싸우며 사느냐, 서로 돕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장애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즉 교회는 세상적으로 볼 때 좀 더 장애가 많은 분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보다 좋은 것은 서로가 장애인인 것을 알기에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고, 그 장애자를 불러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37년간 목회하면서 요즘 절실히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하, 내가 이제까지 장애인을 데리고 목회를 했구나!” 하는 겁니다. 물론 저도 역시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 같은 장애인을 목사로 세우시고 이제까지 사용하시니 참 신기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인상 깊은 구절이 있습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여러분, 사람이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장애를 겪게 되고, 많은 고통과 고생을 하여 만신창이가 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장애가 있어도 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장애가 있어서 너도나도 모두가 죽는다면 이 세상에는 살아서 남아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애의 고통 속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장애자지만 나 같은 장애자를 사용하셔서 또 다른 장애자를 돌보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장애자가 된 인류를 구속하고 그들을 돌보라고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이유도 우리가 불완전하고 장애인이기에 우리를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목사님을 세우고 여러분들을 부르신 이유는 장애자를 불러서 그들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4월 20일만, 12월 3일만 장애인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평생이 장애인의 삶이며, 우리의 사명도 장애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장애인인데, 장애인이 장애인을 돌아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아무쪼록 장애인을 서로 돌아보는 중에 하늘에서 큰 칭찬과 상급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