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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쓰디쓴 절망을 맞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살고 싶었습니까? 죽고 싶었습니까? 그리고 지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절망입니까? 소망이니까?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절망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당신의 인생은 실패요, 파멸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결국은 성공이요 행복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는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그 장소에 한번 가보십시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던 골고다 언덕 위입니다. 그곳에는 소망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절망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고 계셨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이 절망 앞에 그토록 무기력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소망의 불빛마저 꺼지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 날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절망의 무덤 문을 박차고 주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날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절망에 빠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겠노라. 나도 저희와 같이 절망의 고통에서 몸부림을 쳤었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이겼노라. 절망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세상을 이겼노라 .”
여러분, 예수님은 사망을 생명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질병의 고통을 치료와 건강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가 예수님에게 다가오면 예수님은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남편을 6명이나 갈아 보면서 자신의 희망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그 모든 남편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목말라하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자 그 여인의 절망은 곧 소망으로 바꾸어졌습니다.
38년 동안 병석에 드러누워 있어 꼼짝을 못하는 한 불쌍한 남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서자 그 남자가 금세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희망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비가 죽음으로서 절망에 사로잡힌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이 나타나자 그곳에도 절망의 곡성이 떠나가고 희망의 외침이 들려졌습니다.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풀이 죽어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자 그도 역시 만선의 축복을 체험하며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누님 교통사고 : 시집도 안간 처녀가 이마에 큰 상처가 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희망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평상시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찢어진 이마를 꿰매는 수술을 하므로 주름살이 모두 펴졌습니다. 마취 없이 수술하므로(?) 꿰맨 수술 자국도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청년회 총각 :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일하다가 ‘펑-’하고 무엇이 터지는 사고가 나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심방가서 보니 미라처럼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그 총각이 울면서 말합니다. “난 이제 어떡해! 장가는 어떻게 갑니까?” 그러나 그것 역시 희망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평상시 얼굴에 상처가 있고, 곰보 얼굴이었고, 시커먼 얼굴이었는데 화상을 치료하고 보니 새살이 돋아 나와 어린아이 피부처럼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이란 사람 :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자였습니다. 고침 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는데 차갑게 말을 합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7번 목욕을 하라.” :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갔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한번 해보시지요. 주인님!” 하고 말을 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7번 목욕을 하고 나오자 몸이 어린아이 살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에게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떠한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곳에서도 찬란한 빛을 만들어 내신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희망의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절망의 한숨을 쉬는 사람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고 외친 다윗과 같이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외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면 죽음도 우리에게는 희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어떠한 절망의 깊은 감옥도 희망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그만 빌립보 깊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그곳에서도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결국 절망의 감옥 문은 열려지고, 수갑도, 족쇄도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절망이라는 깊은 감옥과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될 때 누구를 바라보시겠습니까? 희망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절망 그 자체의 환경이겠습니까? 아니면 도울 수 없는 인생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롬5:3)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3) 여러분,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오면 분명 낙심해하고, 우울해 하고, 슬퍼져야 되는데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니 성경이 우리에게 위선을 부리라는 것입니까? 객기를 부리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슬퍼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마지못해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우리에는 희망이 생겨납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식의 책이 아니라 희망의 책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 이국땅에서 살아가면서 절망을 맛보고 있지 않습니까? 절망의 긴 터널 속에서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당신의 절망은 곧 찬란한 희망으로 바뀐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증인들도, 성경 속에 나온 믿음의 선배들도 이 말이 맞는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절망의 늪에 빠져 스스로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생을 구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을 단순한 선생이요, 학자요, 종교가라기보다는 구세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분은 절망에 빠진 너와 나를 구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질병과 가난, 죽음과 각종 저주, 그리고 미움과 다툼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구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다면 희망을 외치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희망을 외치는 당신에게 정녕 그 희망은 이루어집니다.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시험 중에서도 그 희망의 빛은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영영토록 예수님과 더불어 지속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