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덜 고생하는 비결

날짜: 
2024/12/08
말씀: 
행26:13-15
말씀구절: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설교: 

각 나라마다 사회복지제도가 있습니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된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하고, 모두가 그런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는 꽤 괜찮은 나라입니다. 캐나다는 아동복지나 장애인 복지뿐만 아니라 노인 복지도 잘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만 65세가 되기 몇 개월 전에 정부에서 편지가 옵니다. 65세에 은퇴를 하겠느냐 아니면 좀 더 일을 하겠느냐고 묻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편지에 답변서를 보내면 그 답변서를 토대로 정부가 노인 연금을 비롯해 노인 복지 혜택을 개인에 맞춰 준비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65세에 맞춰 은퇴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65세 전에 은퇴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65세 이상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마다 은퇴하는 시기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버틸 수 있느냐 못 버티냐는 겁니다. 65세 이후에도 버틸 수 있다면 몇 년 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개 65세 정도가 되면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일을 하며 버티는 데에 피곤함과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제가 여기 캘거리 목사님들 중에 65세가 가까운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65세에 정확히 은퇴를 할 건가요? 아- 왜 좀 더 일을 하시지요? 요즘은 옛날보다 평균 수명도 길어지고 건강도 좋아져서 좀 더 일을 해도 괜찮을 텐데요?”

이 질문에 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육체적으로는 되는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는 힘들어서 안 되겠어요. 65세까지만 하고 은퇴를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러자 65세 은퇴를 앞둔 다른 목사님들도 이에 동의를 하면서 말을 합니다. “아- 맞아요. 나이가 먹으니까 목회가 정신적으로 더욱 피곤함을 느끼게 되요.”

이때 다른 목사님들이 저를 쳐다봅니다. 제가 올해 만 65세가 되었는데도 은퇴하지 않고 계속 목회를 하니까, 아직도 제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틸 수 있는가 하고 쳐다보는 겁니다. 어때요?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아직은 좀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Who knows? 누가 알겠습니까? 사실 65세 이상 나이가 되어서는 내일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65세가 되어서 이대로 목회를 마치려니까 너무 허무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죄송하기도 하고요. 아시다시피 최근 2-3년 정도는 COVID-19 때문에 제대로 목회를 할 수 없었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위해 뭔가 좀 더 이루어놓아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주님이 저를 좀 더 쓰시겠다고 하니까 “아- 그러면 주님이 좀 더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시겠구나.” 하며 계속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비단 목회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각자 직장생활이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때로는 “아- 이거 좀 힘들다.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하시는 분도 있을 테고, 아직은 좀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요즘은 겉으로 보기에 한창 일해야 하는 젊은 분들도 빨리 은퇴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왜 그러지요? 많이 피곤하고 힘이 드니까 그러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분들이 계속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일겁니다. 이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을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좀 마음에 안 들겠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어때요? 이 말씀에 ‘종신토록 수고하여야’란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가축들의 경우를 봅시다. 닭이 언제까지 살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거나,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사료만 축내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요?

좀 안 됐지만 치킨이 되겠지요. 왜요? 이건 좀 잔인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치킨 좋아하잖아요.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언제까지 삽니까? 젖소가 더 이상 젖을 내지 못하거나, 일하는 소가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거나, 혹은 식용용 소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예- 맛있는 비프가 되겠지요.

뭐- 가축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죽어라고 힘쓰고 고생하다가, 주어진 수명이 다하면 결국 병이 들고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그러니까 인생은 태어나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생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욥기서 5:7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하늘 위로 날음 같으니라.” 즉 동물들을 비롯해 인간인 너와 내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심히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8:22-23에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지혜의 왕인 솔로몬도 말년에 고백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도다.”(전1:8)

한국에서 사는 것이 피곤하고 고생이 되어서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캐나다에 왔는데 아- 여기도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휴- 내가 이곳에 왜 왔지?” 저 같은 또래의 옛날 분들은 이때 고운봉 씨의 이런 노래가 입에서 자연히 나옵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자- 한국도 그렇고 여기 캐나다도 그렇고 인생사는 것이 누구나 다 고생인데, 제가 그래도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위해 조금 덜 고생하며 사는 비결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알면 오늘 수지맞는 겁니다. 인생 진짜 좋아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간증이 나옵니다.

한때 그는 교회를 몹시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멀리 외국 성인 시리아의 다메섹까지 가서 크리스천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정오쯤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들 일행에게 촥- 비췄습니다. 아- 눈 부셔!

그리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여러분, ‘가시채’는 소나 짐승을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막대기 끝에다가 가시채를 달아서 소나 짐승이 엉뚱한 길로 가면 그것으로 툭툭- 칩니다. 이놈아- 똑바로 제대로 가라니까!

그런데 소나 짐승이 가시채를 맞으니까 화딱지가 나서 뒷발질을 마구마구 해댑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시채에 찔려서 더욱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자기 고집대로 인생을 살면 고생이 더욱 심해진다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기에 우리들의 체질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고생이 덜 되는지, 혹은 고생이 더 심하게 되는지를 잘 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생하며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33 말씀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 말 중에 “사서 고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괜한 고생,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고생은 해봤자 아무런 유익도 없고 후회만 하게 됩니다. 또한 “매를 자초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죄 짓고, 그렇게 못되게 행동하고 살면 나중에 하나님께 한 대 맞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덜 고생하며, 덜 맞고 사는 비결 중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라는 겁니다.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살라는 겁니다. 찬송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새찬송가 387장)

아- 예수님이 떠나가긴 왜 떠나갑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멀리 떠나가서 고생해놓고 놓고 왜 예수님에게 떠나가지 말라고 뒤집어씌웁니까? 하여튼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양이 목자를 떠나면 그날로 고생입니다.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꽃이 안 핍니다. 열매도 못 맺습니다. 도리어 말라비틀어져서 화로의 땔감이 되고 맙니다. 즉 하나님 떠나서 살면 개고생합니다.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고, 좋게 말할 때 하나님을 잘 믿으십시오. 제발요. 저에게 죽을 때에 유언의 말을 하라면 이게 제 유언입니다. 제가 언젠가 죽어서 장례식을 치룰 때 이 설교 부분을 뽑아서 오신 분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장례식에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부디 하나님을 잘 믿으시고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할렐루야!“

여러분,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목적은 결국 뭡니까? 예- 하나님 잘 믿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성도님들을 위해 늘 기도하는데 무슨 기도를 할까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뿐인 짧은 인생 고생 덜하고, 후회 덜하고, 기왕이면 좀 더 행복하게 살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그토록 이토록 원하시고 바라시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아-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 자녀들이 기왕이면 고생 좀 덜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잖아요.

이때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 목사님! 저도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싶습니다.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꼭 교회를 가야만 행복해지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겁니까? 아- 교회 다녀도 개차반 신자들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교회 다니면 그게 더 고생입니다. 교회 다니면 불편함을 느낍니다.“

아- 그래서요? 그래서 교회 안 다니려고 하는 겁니까? 아-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굽니까? 학교 화장실이 더럽고 냄새가 난다고 자기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냅니까? 뭐-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시고,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교회를 통해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축복과 행복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했습니다.(엡1:23) 고로 저 같으면 차라리 학교를 안 다닐지언정, 직장을 안 다닐지언정, 차라리 장가를 못 갈지언정, 교회는 꼭 다니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왜요? 아- 그것이 인생 덜 고생하며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산다고 하는 것이 큰 고생입니다. 그것도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안 오는 짧은 인생입니다. 금방 나이 먹고 늙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인생입니다. 이 인생의 수고와 고생의 무거운 짐을 조금은 더 가볍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너와 내가 종종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아무쪼록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면서 그때그때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안식과 평안을 얻으십시오. 때때로 주님이 주시는 큰 기쁨과 행복과 함께 인생의 보람을 맛보며 보다 복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한 평생 고생만 하면서 살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져야만 하는 죄인을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믿고 비로소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좀 더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