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방법 나쁜 방법

날짜: 
2010/09/20
설교: 

마26:52 좋은 방법 나쁜 방법
한 시골 마을에 결혼 50주년 잔치를 하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결혼 후 단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쩜 그럴 수가 있는가?" 마을 사람들은 50년간 부부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은 비결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잔치가 끝나고 난 후 그 노부부 남편의 친한 친구가 조용히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도대체 어떻게 50년 동안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하고 살 수 있는가? 그 비결을 나한테 가르쳐 줄 수 없겠나?"
그러자 그 할아버지가 이상하게도 한숨을 푹 쉬면서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비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50년 전 부부가 결혼을 하여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요즘은 신랑신부가 결혼을 하면 리무진이나 좋은 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나 호화로운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지만, 당시는 시골이라 남편도 나귀를 타고 아내도 나귀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탄 나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꾸 옆길로 가려고 하고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아내는 나귀에서 내리더니 나귀에게 경고의 말을 했습니다. "이번이 첫 번째다." 그리고 다시 나귀에 올라탔는데 나귀는 또 다시 말을 듣지 않고 자꾸 옆길로 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아내는 다시 나귀에서 내리더니 큰 소리로 경고를 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다."
그런데 나귀는 아내의 두 번째 경고도 무시하고 또 다시 옆길로 가려고 하면서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크게 화를 내더니 보따리를 풀어 권총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나귀를 향하여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방아쇠를 잡아당겼습니다. 나귀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신랑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아내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말 못하는 나귀가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나귀를 죽이면 어떻게 하는 거요?" 그러자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손가락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번이 첫 번째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기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겁도 났습니다. 아내가 타고 간 나귀가 죽었기에 남편은 할 수 없이 아내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자기는 나귀의 고삐를 잡고 여행을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나귀에 타고 있는 아내가 자꾸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방귀였습니다. 남편은 그 냄새에 코를 막고 아내가 들으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성질도 고약한 것이 방귀냄새도 되게 고약하네!"
그런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을 아내가 들었습니다. 아내는 갑자기 나귀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을 향하여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경고의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조금 전에 아내가 나귀에게 "이번이 두 번째다."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만약 자신이 세 번째 아내의 비위를 건드리면 자신도 어떻게 될 것이란 것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50년간 부부싸움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 노부부는 50년간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금슬이 좋은 화목한 부부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알고 보니 그들 부부의 겉으로의 평화로움과 겉으로의 화목은 진정한 화목,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강압에 의한, 아내의 협박에 의한 거짓된 평화로움이었습니다. 즉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 좋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크리스천이 가져야할 방법론에 대하여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좋은 목적도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좋은 방법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한다." 물론 이 말이 나온 상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평화를 좋아하는데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럴 때 우리나라는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이 말은 그 자체가 어폐가 있습니다. 평화와 전쟁이란 두 단어는 서로 전혀 반대되는 말입니다. 만약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한다."라는 말을 예수님이 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참으로 예수님답지 않은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혹은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평화를 성취하려는가?" 하고 예수님에게 핀잔을 줄는지 모릅니다. 즉 목적이 좋으면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도 좋아야 진짜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친 후 눈을 들어 보니 수많은 무리들이 칼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하속인 말고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베드로야 잘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서는 종종 칼을 써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즉 아무리 선하고 좋은 목적이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나쁜 방법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쁜 방법을 쓰면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방법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은 성경에서 참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의 오른 뼘을 치거든 왼 뼘도 돌려대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줘라." "겉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도 줘라."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을 뜻합니까? 다름 아닌 크리스천들이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좋은 방법을 쓰라는 것입니다. 즉 폭력과 비방의 나쁜 방법을 쓰지 말고, 인내와 희생과 사랑의 좋은 방법을 쓰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로 인하여 혹시 예수님처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을 고수해야 합니다. 좋은 방법만이 진정으로 하늘나라를 아름답게 가꾸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가꾸기 위해 끝까지 좋은 방법을 사용하시다가 이 땅에서의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때론 폭력과 정치적인 권모술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다가 죽으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을 메시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결단코 좋은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용한 방법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옛날 어느 마음에 가난한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도덕군자였고 학자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책을 읽어 둔갑술도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용한 의원이 찾아와 개 천 마리를 먹으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효자는 한밤중에 도술을 부려 호랑이로 둔갑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 도둑질을 했습니다.
효자가 개 9백99마리를 도적질해서 어머니에게 드리니 병도 거의 나았습니다. 이제 한 마리만 더 먹으면 씻은 듯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남편의 행적을 이상하게 여겼던 아내가 도술 책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로 둔갑했던 그 효자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어, 거친 호랑이로 날뛰다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도 죽고, 그의 아내도 죽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불의한 도둑질을 하다가 가족 전체가 죽고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적이 아무리 훌륭하고 좋다고 해도,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이 그릇되면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즉 "성경을 읽는다는 구실로 남의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서양 격언도 바로 이런 것을 깨우치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을 살 때 목적도 옳아야 되지만 방법이 더욱 옳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방법론은 무시하고 목적론만 강조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좋지 못한 방법을 씁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사용했던 나쁜 방법은 철저히 숨기고 남들에게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만을 자랑합니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위대하고 뽐냅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파묻혀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스스로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의 날, 그들이 사용한 방법을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좋지 못한 방법을 쓴 사람이 스스로 쓴 면류관과 금메달을 박탈할 것입니다. 그때 수치함이 더하게 됩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이 "네가 얼마나 큰일을 이루었느냐?" 보다는 "어떠한 방법을 가지고 일을 하였느냐?"로 상급을 결정할 것입니다. 아무리 큰일을 이루었어도 방법이 나쁘면 하나님은 그를 악한 종으로 여기고 내쫓고 맙니다. 그러나 비록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어도 바르고 좋은 방법을 쓰다가 죽으면 그에게 큰상을 주십니다.
여러분, 때로는 예수님의 방법론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고지식하고 미련하게 보일는지 모릅니다. 융통성이 없고 비효과적이라고 생각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아무리 똑똑한 인간의 방법보다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이 훨씬 더 좋습니다. 아무쪼록 성경이 가르쳐준 정직한 방법, 선한 방법을 사용하시면서 하늘나라를 가꾸어나가시고 그 날에 칭찬과 상급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