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기분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뭔가 일들이 술술 잘 풀어지고 형통하면 일단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면 이래도 막히고 저래도 막히고 불통하면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동행을 하며 기도를 많이 하고 사는 분들에게 있어서 조그만 불통의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그게 예사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불통이 지금 당장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나중에 혹은 언젠가 그 작은 불통으로 인해 아주 큰 불행의 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들은 반드시 그 불통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혹시 내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일단 불통이 오면 곰곰이 생각하면서 혹시 모르게 지은 죄가 있으면 회개합니다. 특히 완전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의 형통함을 늘 느끼고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불통의 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일단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하나님, 도대체 이게 웬일입니까?”
이때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이유를 발견합니다. 30년 전에 저희 집에 아주 큰 불통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지방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집에 돌아오셨는데 얼굴빛이 심히 좋지 않습니다. 거의 초죽음 상태였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합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들어보니 무지막지한 세금이 나왔다는 겁니다.
당시 서울 30평대 아파트가 대략 삼천만원 정도 할 때였는데 세금이 무려 1억 2천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당장 며칠 안에 세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갑자기 사업이 무너지고 쫄딱 망할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아버님은 낙심해서 드러누우셨습니다. 그러나 저와 어머님은 기도의 사람이라 즉시 동네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기도를 합니다. “주여, 이게 웬 일입니까? 축복을 주실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축복을 거두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기도를 하는 동안 저희 어머님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몇 년 전 평택에서 사업을 하다가 바빠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같이 서울로 오지 못하고 그곳 평택 순복음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바로 성전 건축 헌금 작정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님도 100만원을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일단 1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작정한 90만원 헌금을 그만 바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억 2천만 원 세금이라는 이 큰 불통의 사건으로 인해 기도하다가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즉시 어머님이 돈을 꿔서 평택에 내려갔습니다. 목사님을 만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나머지 작정한 헌금을 드리고 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억 2천만 원 세금이 천만 원으로 감면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휴-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이 다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천만 원 세금도 사실 우리가 낼 것이 아니고, 아무개 사장이 내야할 것인데... 이것마저 감면해주세요.” 그리고 또 다시 100만원을 준비하여 감사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세금을 100만원만 내도된다고 세무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할렐루야!
혹시 여러분들에게도 최근 불통의 사건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뭐- 우리는 하루에도 몇 개씩 불통의 사건이 생기기도 하고 또 몇 개씩 형통의 사건이 생기기도 합니다. 다만 기도가 부족하거나 깨달음이 부족하여 그것을 잘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조그만 불통의 사건은 사람들이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분이 좀 나쁠 뿐입니다.
그러나 늘 주님과 동행하면서 신의 형통 속에서 사는 분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작은 불통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기분이 좀 나쁜 것이 아니라 아주 기분이 나쁩니다. 그리고 때로는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완벽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내가 실수로 놓치지는 않았는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 불통은 나의 불완전함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집고 넘어갈 사안입니다.
혹시 여러분을 기분 나쁘게 하는 불통의 일들이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그리고 그 응답을 받으면서 다시금 기분이 좋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불통이 형통으로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이에게는 처음에는 불통의 인생이 되지만 나중에는 형통의 인생이 될 때가 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에게는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형통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나중에, 결국에는 큰 불통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일단 최종적으로 볼 때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죽어서도 사망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기니까 결국은 형통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삶, 속세의 삶, 이곳 캐나다의 삶은 어떻습니까? 물론 신이 아닌 이상 100% 형통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간에게 100% 형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전도서7:14의 말씀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제가 살면서 기분이 아주 좋은 기억나는 형통의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성전을 사고 나서 얼마 후에 지금의 성가대 연습실로 사용하는 도서실이 꾸며질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그 방은 이전 주인이었던 앵글리칸 처치(Anglican Church)가 중고물품들을 판매하는 방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이 성전을 구입하자 그 자리는 물건을 모두 가져가서 텅- 비게 되었습니다. “주여, 이 큰 방이 비었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그리고 이 방을 도서실로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캘거리에 유일한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 문을 닫는다고 책을 우리보고 모두 공짜로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책과 책장들을 우리 교회로 모두 가져 왔습니다. 그때 참 신기한 것은 모든 책장들이 그 방의 구조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참 신기하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 형통 속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사랑하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형통을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쇼핑을 하는데 내가 생각하고 마음먹은 것이 거기에 딱 하나 있는 겁니다. “와- 할렐루야!” 기분이 되게 좋습니다. “주여, 저를 위해 예비해 두셨군요.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쇼핑을 하면서 종업원에게 물었습니다. “이 물건 어디 있지요?” 그 종업원이 대답합니다. “저기에 있는데 딱 하나가 남았네요.” 할렐루야!
그리고 몇 달 전에 제가 사용하던 자동차를 팔 때에도 형통이 있었습니다. 당시 도요타 딜러가 제 차를 보더니 3천불을 쳐준다고 합니다. 우박을 한 번 맞은 차량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3천 불이 뭐야?“ 뭔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몇 달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수리비가 3천불 보다 더 나올 것 같아서 아무래도 이 차를 팔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키지지(Kijiji)에 그 차량을 내놓았습니다. 얼마에요? 7700불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날로 몇 시간 후에 한 분이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지금 타고 있는 차가 그 날 만료가 되어 당장 다른 차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구입하고 싶은 차가 바로 제가 가지고 있던 베이지 색 시엔나(Sienna) 차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날로 뚝딱 팔았습니다. 얼마에요? 8천불입니다. 아주 순식간에 일이 처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중고차를 어떻게 팔고 인수인계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 분이 알아서 잘 처리를 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118:25) 아시다시피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10여년이나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었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자 유다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성전에 올라가서 오늘의 본문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형통케 하소서.”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다윗을 형통케 하셔서 그는 35세에 이스라엘을 통일했고 나라가 번영했습니다. 그리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며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이런 기도를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주여, 형통케 하소서.” 특히 요즘 우리는 COVID-19으로 인하여 여러 모습으로 불통을 당할 위험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환난뿐만 아니다 또 다른 말세의 재난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 위험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때 신기하게 그러한 불통을 피해가며 형통의 줄을 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보면 이번 COVID-19 사건이 도리어 형통의 기회가 된 분들도 있습니다. 단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으로 보호함을 얻고 돌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그 지역이 크게 기근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까마귀가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에 고기와 떡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극심한 기근 속에서도 살이 포동포동 찌고 때깔이 좋았습니다. 신의 형통함입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돌봄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특별한 형통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의 요셉이 그렇고, 다니엘이 그렇고, 오늘의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형통의 사람입니까? 불통의 사람입니까? 즉 성령님에 감동된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감동과 역사가 끊어진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의 신에 감동 속에서 사는 사람은 처음과 당장은 불통 같이 보여도 나중에 보면 결국 형통이고 행복입니다.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그 자체가 형통이고 행복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면 그 자체가 불통이요 불행입니다.
이번 COVID-19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여러 가지 재난 속에서도 우리는 반드시 형통해야 합니다. 기분이 좋아져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우울하면 안 됩니다. 답답하거나 마음이 상하면 안 됩니다. 아무쪼록 불통도 형통으로 바뀌고, 말세의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과 함께 늘 형통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