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집에 거하는 복

날짜: 
2016/08/21
말씀: 
시84:1-4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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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좀 더 포근한 집, 안락한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공통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을 단지 건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건물만이 집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구나 겪었을 줄 압니다만 어렸을 때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갑니다. 그런데 집에 어머니가 없으면 그곳은 따듯하고 포근한 집이 아니라 오히려 썰렁한 광야와 같은 장소가 되고 맙니다. 즉 건물이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나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찾아갈 때는 건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가출하는 것도 집이 냄새나고 좁고 지저분해서 가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품이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크고 비싼 집에서 살더라도 그 건물 안에 진정한 안식처인 부모의 품이 없으면 자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우리는 집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집이 됩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는 남편은 아내가 집이 되고 아내는 남편이 집이 됩니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내가 남편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건물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내의 품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포근하고, 아늑하고, 남편의 집이 될 때 그 남편은 아내 곁에서 안식을 얻고, 평화를 누리며,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미모가 아름다워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의 곁을 남편이 떠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모도 별 볼일 없고 전혀 매력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곁에 있으면 아늑하고 편안해서 남편의 집이 되어주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 21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그리고 잠언서 17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즉 누가 가장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냐? 나를 포근하게 해주는 가족 식구들이 있는 집에서 사는 사람이 가장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이 되어주고, 결혼한 후에는 배우자가 집이 되어준다 하지만 부모도 떠나고 배우자도 먼저 세상을 떠나면 누가 나의 집이 되어줍니까? 아들과 딸이 나의 집이 되어줍니까? 아니면 강아지가 나의 집이 되어 줍니까? 아니면 텔레비전이 나의 집이 되어줍니까?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집이 되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4)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되고, 거처가 되고, 나의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나의 집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절)
본문의 시편 84편을 지은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의 집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거처로 삼았습니다. 이 시를 고라의 자손들이 썼다고도 말하고, 다윗이 썼다고도 말을 합니다. 시인에 대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것은 은혜 받은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시인이 왜 주의 장막을 이렇게 사랑했을까요? 만약에 이 시를 다윗이 지었다고 한다면 당시에 성막이라는 것은 성전을 건축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법궤가 안치된 자그마한 천막집이었습니다. 거기는 거할 집이 아니었습니다. 거처가 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 다. 조그마한 텐트입니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주의 집’이나 ‘주의 장막’은 어느 건물에 대한 공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장막이고, 거처고, 삶의 터전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앞두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천국에다 우리가 거할 영원한 집을 지어주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다 집을 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전, 하나님의 집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난다고 할 때 제자들이 근심했습니다. 걱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전능하신 권능의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살았는데 그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사나? 누구를 의지하고 사나? 이 세상 어느 곳에 가서 우리가 살 수 있나?" 하고 걱정합니다. 즉 마음의 안식처요 행복의 집이 되시는 예수님이 사라지면 나는 어디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러한 염려와 불안은 오순절날 성령이 그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거처를 잡자 일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즉 예수님이 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집을 지으시므로 우리는 안식과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성령의 집이 지어져 있지 않았다면 마치 어린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으나 어머니가 없는 경우처럼 허전해지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 한번 체크해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이 집을 짓고 살아 계시고 있는가? 지금 나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어디에 가든지 포근함을 느끼고 있는가?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집을 짓고 계신다면 우리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 가든지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안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도 우리가 안식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예수님의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대화를 나누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포근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각자가 작은 예수님이 되고, 작은 하나님이 되어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 우리 교회에 오는 분들이 포근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가정이나 일터나 학교나 어디서나 대하는 사람들이 포근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내 스스로 안식처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될 줄 믿습니다.